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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맛 ⑪ 민어

2020-07-31 2020년 8월호

민어民魚

울음소리 들리던 바다

인천만의 ‘그 맛’이 있다. 지역 음식에는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끝낼 일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인천의 산과 들에서 자라고, 바다와 갯벌에서 펄떡이고 있을 먹거리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맛을 기록한다. 그 열한 번째는 굴업도와 덕적도 파시波市부터 오늘 신포동 골목까지 이어온 맛, ‘귀한 여름 생선’ 민어民魚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덕적도 민어잡이 어부상(왼쪽)
신포시장 민어 골목 ‘경남횟집’의 제형남 대표(오른족)


만선의 기억

2층 창밖 북리항北里港 너머로, 배를 기다린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펄럭이는 깃발. 민어잡이 배가 만선으로 출렁이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거친 파도와 바람에도 기어이 배를 타야만 하는 것이 뱃사람의 운명. 선주船主는 이제야 한시름을 놓는다.


덕적도 북리는 1920~1960년대 민어 파시로 돈과 사람이 넘쳐났다. “이맘때면 민어 잡으러 멀리 전라도 배들까지 죄다 북리로 몰려들었지. 배가 하도 많아서 선창에 댄 배들 사이를 징검다리 건너듯 다녔어.” 뱃사람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돈을 따라 육지 사람들도 흘러들어왔다. “부자 마을이었어. 다방, 술집 없는 게 없었지. 그 옛날 섬에 상설 극장까지 있었으니까. 약장수도 그렇게들 많이 찾아왔어. 허허.” 덕적도의 조선공이었던 강명선(78) 할아버지는 풍요롭던 섬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덕적도와 굴업도는 ‘민어의 섬’이었다. 1920년 굴업도 가까이 있는 장봉수도長峯水道는 민어가 차오르는 7~9월이면 전국에서 고기잡이배 500여 척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1923년 8월 불어닥친 태풍이 섬을 무참히 휩쓸었다. 그리고 바다로 간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어기중漁期中의 굴업도 전멸堀業島全滅’. 그해 8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배 200여 척이 부서지고, 가옥 130호가 바람에 날아갔으며, 뱃사람 1,200명이 행방불명됐다’라고 쓰고 있다. 그렇게 굴업도가 지고 덕적도 북리가 ‘어업 전진 기지’로 떠올랐다.
민어, 조기, 도미, 가자미, 홍어, 새우, 갈치, 농어…. 덕적 바다엔 사시사철 자연의 산물이 모여들었다. 민어가 하도 많이 나서 귀한지도 몰랐다. “날씨가 좋으면 동네 아이들이 소풍 삼아 고기잡이배에 따라 올라타곤 했어. 뱃일을 마치면 아이들 품에 민어 두세 마리씩 척척 안겨줬지.”


오늘, 텅 빈 덕적도 북리항.
한때 고깃배가 쉼 없이 드나들던 부둣가엔,
정적이 흐른다.



1960년대 전국에서 온 민어잡이 배로
북적이던 북리항


파시는 끝났다

민어는 백성 민民자가 들어가는 이름과 달리, 예로부터 흔히 상에 올릴 수 있는 생선이 아니었다. 조선 시대 임금과 사대부가 즐겨 먹던 귀한 어종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비싼 값에 일본으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덕적도에선 양반, 평민 할 것 없이 민어를 즐겨 먹었다.
민어는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 중국 발해만渤海灣에 주로 서식한다. 이들 바다는 수심이 40~120m 내외로 갯벌이 있어 젓새우가 살기 좋다. 먹이가 풍부하니 물고기도 몰려들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남 신안과 인천에서 민어가 났다. 하지만 자연환경이 달라지고 물고기를 마구 잡아들이면서, 바다가 말라갔다. 이제 덕적도에서도 민어는 금값이다.

“당시 선주들은 자식에게 공부 대신 배 부리는 걸 가르쳤어. 물고기가 넘쳐났으니까. 금어기도 없이 안강망鮟鱇網으로 고기를 깡그리 긁어모았지. 갈치 치어가 잡히면 어묵으로 만들어 먹을 정도였으니까. 평생 물고기가 있을 줄 알았던 게야.” 그렇게 파시는 끝이 났다.


민어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섬을 떠났다. 강명선 할아버지도 1983년 먹고살 길을 찾아 뭍을 밟았다, 예순이 넘어서야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지금이 한창 배가 몰려올 때야. 민어 잡으러.” 밀물처럼 밀려드는 그날의 기억.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은 짙어져만 간다.



강명선 할아버지는 1950~1960년대 목선을 만들던 조선공이었다. 당시 어업 전진 기지인 덕적도에는 조선소가 세 곳이나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들은 배를 부렸다.



‘민어잡이, 선주의 딸’ 북리 할머니들.
어린 시절엔 부둣가에서 아버지가 잡아 온 민어를 말리며 지키는 일이 지겹기만 했다. 오늘 그날처럼 풍요롭진 않아도, 여전히 덕적도가 최고다.


낡은 그물로 건져 올린 시간

북리 작은 쑥개에는 옛 선주 집이 화려했던 그날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다. 세월을 견디다 못해 바스러질 것 같은 몸체가 푸서리 위에서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다.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덕적도로 피란 온 선주가 살던 집이다. “저기 다 부서진 집이 소창무네야. 당시 배를 예닐곱 척 부렸어. 선주 중에서도 베테랑이었지. 돈을 많이 벌어서 뭍으로 나가 극장 사장도 하고 그랬어.” 북리 사람들이 선주 집으로 쳐주는 곳이다. 다른 집들은 개조했기 때문에 진짜가 아니라는 것.


그 집 가까이에는 버려두어 낡아 빠졌을지언정 형체를 갖춘 빈집이 있다. 어르신 말씀에 의하면 민어잡이 배를 부리던 이기조가 살던 집이다. 여름 한낮인데도 으스스한 한기가 감돈다. 부의 상징이었던 2층집. 오늘, 뼈대를 드러내고 군데군데 거미줄이 늘어진 공간엔 버려진 어구가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을 올려다본다. 문과 벽이 없고 사방으로 창이 나 있다. 창 너머로 부둣가를 바라보며, 선주는 난바다로 떠난 배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으리라.


빈집 모퉁이엔 긴 시간이 촘촘히 엮인 면사綿絲 그물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우웅~ 우웅~” 한여름 민어 떼 우는 소리가 덕적 바다 깊숙이에서 들려오면, 섬사람들은 이 그물을 던져 삶의 희망을 낚아 올렸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역사는 남는다. 창 너머 바다에서 민어 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폐허에 한 줄기 햇살이 비집고 들어온다.



민어잡이 배를 부리던 이기조가 살던 2층 집



옛 선주집 내부. 선주는 2층 창 너머로 바다로 떠난 배가
만선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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