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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문교를 찾아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2020-09-01 2020년 9월호

우리는 ‘인천여상인’입니다
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네 번째 등굣길을 따라 신생동 언덕길을 올랐다. 일제의 강점과 광복이 교차했던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75년 찬란한 역사 품은 그 길을 문해자 총동창회장(20회 졸업)과 함께 걸었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역사의 소용돌이가 만든 역사
1945년 4월 12일,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인천 최초 여성 상업학교의 탄생이었다. 지금의 신생동 언덕 위가 아니었다. 당시 율목동에 있던 인천상업학교 건물을 빌려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첫 입학생은 한국인 학생 25명과 일본인 학생 25명이었다.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인천과 경기, 서울에서까지 학생들이 몰렸다.
뜨거웠던 시간도 잠시. 개교 4개월 만에 찾아온 광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를 혼돈에 빠트렸다. 일본인 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한국인 학생만으로는 수업이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제 동원됐던 인천상업학교 남학생들까지 돌아오면서 그나마 빌려 쓰던 교사校舍마저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존폐의 위기를 맞았지만 역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이원옥 교장의 노력으로 인천제1공립초등학교(현 송림초등학교의 옛 교사) 교실 몇 칸을 빌려 학생을 모집했다. 허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광복과 함께 피어난 뜨거운 교육열로 또 한 번 이사를 가야만 했다. 얄궂은 역사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시 인천상업학교로 이끌었다.
“당시 전교생 60여 명이 책상과 의자를 머리에 이고 배다리 거리를 한 줄로 늘어서 이사를 갔다고 합니다. 이후 6개월 만인 1946년 10월에는 만석동에 있던 풍국제분 공장으로 학교를 옮겼고, 1949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신생동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개교 당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는 율목동 인천상업학교 건물을 빌려 입학식을 거행했다.


인천 금융 인재 양성의 산실

1940~1950년대가 혼돈의 시기였다면, 1960~1980년대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가장 찬란히 빛나던 시절이었다. 단언컨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는 인천 여성 실업 교육의 선구자였다. 국가도 인정했다. 1970년대, 당시 정부는 전국 여성 상업학교 네 곳에 최신식 기자재를 지원하고, 학생 수도 줄여가며 인재 양성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부산진여자상업고등학교, 대전여자상업고등학교 그리고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는 딸을 대학에 잘 보내지 않는 시기였습니다. 공부는 잘하는데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이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중학교 한 반 60명 중 최소한 10등 안에는 들어야 원서를 써줄 정도였으니까요.”
실업계 고등학교라는 타이틀 뒤엔 뜨거운 학구열이 있었다. 졸업 후 사회에 뛰어들어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대부분이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 대학교 진학 등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성공은 학생들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인천 지역 금융 산업 성장이 곧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라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현재도 수많은 동문들이 은행과 보험사 등 굴지의 금융 기업 요직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후배들 역시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바늘구멍 같은 취업의 문을 뚫고 있다.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는 자랑스러운 동문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다.

단위 학교 공간 혁신, 학과 개편 등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실내


변화로 준비하는 제2의 전성기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은 때때로 학교를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과 바꿔야 할 것을 잘 알고 있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는 제2의 전성기를 준비하며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다.
“특성화 교육과 함께 많은 학교들이 이름을 변경하는 등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 역시 많은 고민을 거듭했지만, ‘인천여상인’이라는 자부심이 담긴 이름만은 끝까지 지키기로 했습니다. 단, 외형과 내실을 함께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하는 중입니다.”
75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의 오랜 교사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린다. 교육부가 추진하는 ‘단위 학교 공간 혁신’ 사업을 통해 새 옷으로 갈아입는 작업이 순조롭다. 내년 설계가 마무리되면, 머지않아 학생들은 역사와 첨단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
2021년 신입생들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의 달라지는 학과 개편의 첫 수혜자다. 기존 국제통상과가 무역외국어과로, 디지털정보과가 IT크리에이터과로 변경된다. 인천의 특성이 반영된 무역과 관세 분야 산업에 적합한 인재,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걸맞은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의미 있는 변신이다.
“과거의 명성에만 머문다면 학교의 미래는 없습니다. ‘인천여상인’이라는 자부심의 이름을 가슴 깊이 새기고, 학교와 학생, 총동창회가 한마음으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제2의 전성기를 열어나가겠습니다.”


최완순 교장과 문해자 총동창회장, 김현숙 감사(왼쪽부터).
학교와 총동창회의 열의와 노력으로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는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최초, 최고의 대한민국 해양 경찰

박경순 서장(24회 졸업)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동문들의 무대는 분야를 넘나든다. 금융은 기본, 다양한 영역에서 학교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박경순 서장은 1986년 국내 1호 여성 해양 경찰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이후 최초의 여성 총경, 최초의 여성 해양경찰서장으로 승승장구하며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어릴 적 꿈이었던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1991년 등단해 지난해 발표한 시집 <그 바다에 가면>까지 모두 네 권의 시집을 펴냈다. 후배들에게 던진 ‘꿈을 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라는 메시지 그 자체가 박경순 서장의 삶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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