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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민이 소개하는 우리 동네 -청라국제도시

2020-09-01 2020년 9월호

청라국제도시

파렴의 기억


글 장명수(서구 청라커낼로)

나는 지금 소위 국제도시라 일컫는 청라에서 살고 있다. 여기에서 산 지는 5년밖에 되지 않지만, 나는 이곳이 매립되기 훨씬 전 바다였던 1950년 7월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6·25전쟁을 피해 부모님을 따라 서구 연희동 해안에서 썰물 때 갯벌을 걸어 배를 타고 영종으로 피란을 갔다. 그러니 청라와 나의 인연은 70년이 됐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청라는 순수한 우리말인 ‘파렴’이라 불렸다. ‘염(렴)’은 지금은 사라진 말로 ‘작은 바위섬’이라는 뜻이다. ‘파렴’은 호주의 블루 마운틴처럼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색으로 보였으므로 파란 섬이란 의미인 셈이다.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청라靑羅다.
인천 앞바다에는 이름 끝에 ‘염’이 들어간 섬이 많았다. 화력 발전소가 있는 율도는 예전에는 ‘밤염’이었다. 매립 전의 파렴은 해발고도 67.7m, 면적 0.79km2로 원창동 해안에서 3.5km, 연희동 서단에서 2.5km 떨어진 섬이었다. 그때는 여기가 온통 바다이고 매립 전이기 때문에 파렴에는 연희동이나 원창동에서 썰물 때 갯벌을 걸어서 왔다.
그 당시 청라도(파렴)는 가까이 있던, 지금은 매립되어 흔적조차 없는 까투렴, 노렴, 뱀섬보다 면적이 커서 일곱 가구가 살았고, 인천의 어느 초등학교의 분교도 자리한 것으로 기억한다. 조그마한 섬이었던 청라가 1980년대 매립, 2000년대 들어 국제도시로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바다 위에서 푸르게 빛나던 파렴은 섬의 생명을 마감하고 육지가 됐고,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70년 전에 부모님과 함께 영종으로 피란 가기 위해 갯벌을 걸어 지나간 파렴 청라가 이토록 규모가 큰 국제도시로 변할 줄을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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