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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짜장면 탄생 130년

2021-01-11 2021년 1월호


짜장면 탄생 130년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난 옛 공화춘 건물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짜장면 맛은 다 거기서 거긴 줄 알았다. 아니었다. 중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1990년대 중반, 중국음식점별로 짜장면 맛이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냄새와 쫄깃하고 달콤한 식감, 물 흐르듯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부드럽고 따뜻한 면발. 차이나타운과 신포동 곳곳에서 맛보는 짜장면 맛은 입학·졸업식 때 학교 근처나 동네에서 먹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났다. 식당마다 킬러 콘텐츠도 한두 개씩은 갖고 있었다. 깐풍기를 잘하는 집, 고기 튀김이 맛있는 집, 만두소가 특별한 집 등등 저마다의 색깔이 선명했다. 연태고량주나 이과두주를 곁들인 중국요리를 먹을 때마다 ‘인생 뭐 있어? 이게 행복이지’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신포동, 선린동(차이나타운)은 우리나라 최초로 짜장면이 태어난 도시다웠다.
짜장면은 산둥 지방 출신 노동자인 쿨리coolie(苦力)들로부터 비롯됐다. 개항 이후인 1890년대 인천항에서 하역 노동을 하던 쿨리들은 별다른 재료 없이 수타면에 춘장을 얹어 비빈 고향 음식 자장미엔(炸醬麵)을 즐겨 먹었다. 인천항과 쿨리를 주목한 사람이 산둥성 출신 위시광(于希光, 1886~1949)이다. 그는 22세이던 1907년 인천으로 와 ‘산동회관’이란 중국식 숙박 시설 객잔을 열어 중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1912년 청조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면서 위시광은 가게 이름을 공화춘共和春으로 바꾼다. ‘공화국의 봄이 왔다’는 의미였다. 나날이 번창하며 1917년 지금의 ‘짜장면박물관’ 자리에 있던 건물을 매입한 그는 공화춘을 유명한 중화요리점으로 성장시킨다. 공화춘은 그렇게 1983년까지 운영되다 화교들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한 화교정책 등 몇몇 이유로 문을 닫는다.
한동안 빈집으로 방치된 건물을 매입한 곳은 중구청이다. 2010년 공화춘 건물을 매입한 중구는 리모델링을 통해 2012년 우리나라 최초의 짜장면박물관으로 꾸며 시민들에게 개방한다. 공화춘은 사라졌으나 그의 외손녀는 하인천역 부근에서 ‘신승반점’이란 식당을 운영하며 공화춘의 계보를 잇고 있다.
짜장면이 대표적 한국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는 산둥 출신 왕송산이 ‘영화장유’란 식품회사를 차려 캐러멜을 혼합한 ‘사자표 춘장’을 개발한 1948년부터다. 6·25전쟁 직후 원조받은 밀가루와 1964~1977년 국가적으로 진행한 ‘혼·분식장려운동’이 만나면서 짜장면은 가장 대중적인 음식으로 사랑받는다. 지금도 변함없이 국민 사랑을 받는 대한제분 ‘곰표 밀가루’의 탄생도 이 시기다. 짜장면 가격은 물가의 바로미터이기도 했다. 쌀 한 가마니 가격이 3,010원이던 1960년대 초 짜장면 값은 15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중반 140원, 1980년대 350원, 1990년 초 1,300원에서 2000년대 3,000원으로 꾸준히 올라 지금은 한 그릇에 4,000~5,000원 정도 한다.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330배가 오른 셈이다.
소띠 해인 신축년辛丑年 2021년. ‘출출할 때 먹는 짜장면 한 그릇’ 같은 행복을 인천 시민들에게 안겨주기 위해 인천시는 2021년을 소처럼 우직하게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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