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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 칼럼

2021-02-01 2021년 2월호


우현 고유섭과 인천 미술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새얼문화재단이 제작해 기증, 인천시립박물관 광장에 있는 우현 동상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고병복(1935~2013) 여사가 건네준 명함엔 아버지의 생전 어록이 굵게 새겨져 있었다.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의 철학과 사상을 한마디로 드러낸 ‘압축한 태양 광선’ 같은 문장이었다. 우현이 젊은 나이로 눈을 감기 전까지 관장으로 일하던 개성부립박물관 사진도 명함에 담겨 있었다. 우현을 취재하기 위해 고 여사를 만난 때는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어느 날. 서울 인사동에서 함께 칼국수를 먹고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사진기와 스케치북, 가방을 잔뜩 꾸려 집을 나서는 모습만 기억납니다. 1년이면 반은 밖에 나가 계셨는데 돌아오셔도 뭘 쓰거나 책에 몰두하셨어요. 화장실에 갈 때 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으니까.” 우현의 둘째 딸인 그는 아버지를 독서광, 일 중독자로 회상했다. 한국 미술의 근대적 학문 체계를 세운 우리나라 최초 미술사학자. 우현은 서구 미학을 받아들이면서도 한국 미학을 독립적으로 개척한 인물이다. 1936~1941년 저술한 <조선탑파의 연구>에서 그는 한국미의 특징을 선명하게 규정한다.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민예적인 것, 비정제성, 적조미, 무관심성 등 우현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오감으로 체험하고 연구한 결과를 간결하면서 명확한 언어로 정리했다. 일제강점기, 선행 연구는커녕 개념조차 서지 않았던 한국미의 특징을 정립하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것이다. 1905년 2월 2일 인천 용동에서 태어난 우현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경성제대에 입학,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다. 우현은 1930년대 초부터 ‘미학의 역사 개관’(1930),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1931), ‘조선탑파의 개설’(1932), ‘고려의 불사건축’(1935)과 같은 한국미에 관한 논문을 왕성하게 발표한다. 특히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한 이후엔 전국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초인적 연구를 이어간다. 그렇게 1944년 39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웬만한 연구자라면 평생 해도 쌓지 못할 업적을 남기며 후학들에게 큰길을 터주었다. 우현과 더불어 인천에선 선이 굵은 미술인들이 많이 나왔다. 인물화의 대가 김은호, 좌수서의 유희강, 미술평론가 이경성, 조각가 조규봉, 서양화가 우문국·장발·황추·김영건, 서예가 박세림과 같은 미술가들이 인천의미술인들이다. 자유공원·차이나타운의 이국적 실루엣과 월미도·인천항 석양의 강렬한 색채는 그림의 좋은 소재였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 까까머리 아이들과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중구 일대에 모여 화가의 꿈을 그렸고 훌륭한 작가로 성장했다. 암울했던 시대를 극복하며 한국 미술사와 미학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쌓은 우현의 영혼은 1992년 새얼문화재단이 헌정한 동상으로 부활한다. 인천시는 우현 선생의 학문적·예술적 업적을 계승한 사람들에게 매년 우현상을 시상하고 있기도 하다. 116년 전, 우현이 탄생한 2월엔 인천시립박물관을 찾아도자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선생을 만나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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