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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개관 75주년, 인천시립박물관 가는 길

2021-03-30 2021년 4월호

개관 75주년, 인천시립박물관 가는 길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1946년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 개관한
인천시립박물관의 현재 모습. 사진 왼쪽은 우현 고유섭 동상이고
가운데 열차는 1969년 제작한 협궤열차다.

석남 이경성 흉상


헌칠한 키에 잘생긴 28세의 청년은 1945년 8월 15일 광복하자마자 인천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청년은 부평 조병창에서 중국 철제 종을 실어 오는가 하면 매머드 상아, 자기 파편 등 인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유물들을 그러모았다. 개미처럼 수집한 유물은 송학동 세창양행(현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자리) 사택에 보관했다. 그해 10월 3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을 세우며 초대 관장으로 취임한 청년 이경성李慶成(1919~2009)은 이듬해 4월 1일 세창양행 사택에서 정식 개관식을 갖는다. 좌우익의 갈등과 불안한 치안. 광복 직후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 박물관 개관은 석남石南 이경성의 애향심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물관은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1950년 6월 27일부터 무기한 휴관에 들어간다. 석남은 이때 36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인근 방공호와 창고로 대피시킨다. 선견지명.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 전개와 함께 박물관은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다. 석남이 숨겨뒀던 유물들은 1953년 4월 1일 새롭게 개관한 제물포구락부로 옮겨진다. 이후 37년간 한자리를 지키던 박물관이 지금의 청량산 자락으로 이전한 때는 1990년 5월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이후 석남과 같은 개방형 관장 체제를 중심으로 몇 차례 굵직한 도약의 시기를 지나온다.
첫 도약은 2006년 리모델링 뒤 재개관을 했을 때다. 이때 전시실과 수장고를 확장하고 초대 관장의 호를 딴 석남홀도 마련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전시는 물론이고 음악이 계절처럼 흐르고 유쾌한 논쟁이 펼쳐지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한다. 인천 화평동 출신 석남 선생을 찾아뵀던 때도 그즈음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채 봄 새싹처럼 천진무구한 미소를 보내던 선생의 맑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15년 제39대 개방형 관장 체제 때 박물관은 재도약의 날개를 단다. 39대에선 인천의 위상에 걸맞은 박물관·미술관을 조성하는 ‘뮤지엄파크’를 추진했으며, 강화도 건평돈대에서 ‘불랑기포’를 발굴하는 등 왕성한 연구 조사로 박물관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2019년 5월 시작,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 제41대 개방형 관장 체제에선 수소문 끝에 대전에 있던 ‘수인선 협궤열차’를 찾아내 기증받았고, 한국이민사박물관에 방치됐던 ‘애니깽’ 기계를 끄집어냈다. 멕시코 한인 이민자의 애환이 서린 유물이다. 최근엔 10억원의 정부 공모사업을 따내고, 석남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모란미술관에서 시상하던 ‘석남미술이론가상’을 가져오는 등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다. 이 상은 개관 75주년 기념식과 함께 인천에서 첫 시상식을 갖는다. 반세기 가깝게 ‘인천의 얼’을 기려온 새얼문화재단은 인천 시민의 뜻을 모아 제작한 우현 고유섭 동상에 이어 석남의 흉상을 2016년 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유물은 인류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지 못했던 시·공간으로의 여행이다. 지나온 삶과 역사를 잘 이해할 때 우린 더 행복하고 좋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4월 1일 개관 75주년을 맞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이 봄 햇살을 받아 더 찬연히 빛나는 이유이다.


석남 이경성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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