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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호국보훈의 달-현충탑

2021-06-01 2021년 6월호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님을 기립니다
유격 대원으로서, 첩보 대원으로서 자유 수호를 위해 온몸으로 적과 맞서 싸운 푸른 청춘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평화롭게 이 땅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현충탑과 위령탑을 살펴본다.

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사진 오인영 사진작가



인천광역시 현충탑
최근 야간 경관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수봉공원에는 인천광역시 현충탑이 있다. 현충탑은 인천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가해 숭고한 목숨을 바친 영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72년 공원 정상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나라를 지킨 영령들을 여기 모신다. 몸은 쓰러져도 넋은 나라를 놓지 않고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장하고 매운 정신 황해 마르도록 시민의 가슴에 흐르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미추홀구 도화동 산50-1



재일 학도 의용군 참전비
6·25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거주하던 유학생과 재일 동포 자녀 642명이 재일학도의용군을 조직했다. 의용군은 미국과 국군 부대에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인천상륙작전, 평양 입성, 압록강 해산진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전했다. 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1979년 수봉공원에 재일 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가 건립됐다.
미추홀구 주안2동 산29-1


강화군 현충탑
섬은 적의 침공을 제일선에서 막아내는 바람막이다. 6·25전쟁 때 38선과 맞닿아 있던 우리 지역의 섬들은 온몸으로 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그런 이유로 강화도에는 호국 영령들의 혼이 잠들어 있는 현충 관련 기념비가 많다. 강화군 관청리에는 6·25전쟁 당시 산화한 강화 출신 전몰 군경 1,013명(국군 735명, 특공대 18명, 경찰관 36명, 유격군 224명)의 위령탑인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산20



강화 유격용사 위령탑
1951년 1·4후퇴 당시 강화를 사수하기 위해 평안도, 황해도 연백군, 경기도 개풍군, 개성에서 강화도로 피란 온 애국 청년 1,240명이 유격대를 조직해 용감하게 싸웠다. 이후 육군 제5816부대 직속 유격대로 편성되어 개성까지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들 유격 용사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이다. 탑 머리는 평화와 자유 수호, 왼쪽 날개는 용사의 참혼, 오른쪽 날개는 조국의 안위, 탑 받침은 숭고한 용사의 넋을 대해로 펼침을 상징한다.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208-2 



부평전투 승전 기념비
부평전투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의 최우선 과제이던 서울 수복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경인국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던 연합군은 부평지역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부평전투 승전 기념비는 당시 부평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뿐만 아니라, UN의 깃발 아래 조국의 수호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친 한국과 미국 젊은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부평구 아트센터로 168



반공유격 전적비
1·4후퇴 당시 북에서 백령도로 많은 사람들이 피란을 왔다. 1951년 2월 28일 월남민 중 8,000여 명이 유엔군 관할 하에 반공유격대(8240부대:동키부대)를 조직해 황해도 일원의 기습 작전과 백령도 수호에 크나큰 전공을 세웠다. 반공유격대의 전공을 기리고 장렬히 산화한 영령 516명의 넋을 위로하고자 1961년 8월 15일 전적비를 건립했다.
옹진군 진촌리 산146-1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2,000여명은 축현초등학교에서 출정식을 갖고 남하해 700여 명은 마산에서 해병대로, 1,300여 명은 부산에서 육군으로 자원 입대했다. 그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내며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후세에 참다운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2000년 8월 31일 인천학도의용대 6·25참전회가 주축이 되어 자유공원에 참전기념비와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을 세웠다.
중구 송학동1가 1-1(자유공원 내)



유격군 충혼전적비
육군 을지 제2병단과 함께 ‘타이거여단’이란 이름의 반공유격대 8240부대 용사들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바친 것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 그들은 소총이나 폭발물만 지니고 적의 군사 시설에 벌떼처럼 달려들어 폭파하고 흉탄에 맞아 피 흘리며 쓰러져 갔다. 북녘 산천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교동도에 기단 높이 1.2m, 비 높이 7.2m의 돌비석으로 세워졌다.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8-2



해군 영흥도 전적비
옹진군 영흥도는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점이었다. 영흥도는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적의 동태를 살피는 첩보 활동의 주요 기지였다. 미국 극동사령부 클라크 대위와 해군본부 정보국 임병래 중위가 이끄는 특수공작대가 수집한 정보는 9·15 인천상륙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9월 14일 인민군 부대가 영흥도를 기습 공격했다. 우리 해군 10여 명과 영흥도 애국청년인 해군의용단원 등은 섬 사수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옹진군 영흥면 내리 산314



용유도 충혼탑
1950년 11월 17일 평안북도에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자 평안도 일대 애국청년들과 오산학교 학생이 힘을 모아 1950년 11월 22일 유격 백마부대를 만들었다. 백마부대는 서해 도서 지역을 오가며 북한군 3,000여 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00여 명을 생포하는 등 숱한 전과를 올리며 유엔군의 정규 작전에 크게 도움을 준 비정규군 전투부대이다. 이에 못지않게 아군 552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이 충혼탑은 그때 희생당한 전사자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구 을왕동 산119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시 파병을 결정했고, 콜롬비아는 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에 지원군을 보냈다. 콜롬비아는 교대 병력을 포함해 연인원 5,100여 명의 병력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한국에 보냈다. 이들은 김화 400고지 전투, 연천 180고지 전투, 골모고지 전투 등에서 격전을 치렀다. 콜롬비아군은 군율이 엄하고 용맹하기로 소문났으며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켜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를 흘린 콜롬비아군을 기리고자 1975년 9월 건립했다.
서구 승학로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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