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역사

스케치에 비친 인천 ⑥ 교동도

2021-06-01 2021년 6월호


평화의 섬, 그리움은 희망으로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고제민 화백이 그린, 평화의 섬 교동도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교동 은행나무 33×23.5(cm) 한지 위에 펜 2020
교동 무학리에 있는 천 살 먹은 할머니 나무.
바다 건너 마주 보는 이북 땅에는 할아버지 나무가 산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남과 북, 천년 나무

나무는 천년의 시간을 살았다. 교동 무학리 542번지, 마을 어귀에 뿌리내린 아름드리 은행나무. 해마다 가을이면 노란빛 열매가 휘청휘청 매달린다. 북에서 남으로 꽃가루가 바람에 실려와 결실을 이룬다고, 동네 사람들은 믿는다.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다.
단 2.5km의 바다를 사이에 둔 아픈 역사의 간극.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은 가까운 이웃이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그날 이후, 한반도가 두 동강 나면서 닿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잠시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흘러 강산이 일곱 번 변했다.


마을에 사는 황순숙(74) 할머니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잠시 다녀오마, 하고 바다 건너 윗동네에 갔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생전 아버지를 뵐 줄 알았는데, 이제 글렀어. 내 나이 벌써 일흔넷, 아버지가 살아계셔도 아흔네 살이니….” 죽기 전에 한 번쯤 아버지를 볼 수 있을까, 그러기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이젠 너무 늙어버렸다. 그 마음이 평생 아픔을 삭이며 홀로 버텨온 아내만 할까. 아흔둘의 나이 든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이제 나 혼자야. 한 민족이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난 모르겠어.”


천년의 시간을 나무는 묵묵히 견뎌왔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도 꿋꿋이 가지를 뻗고 단단히 뿌리내렸다. “세상 다 변해도,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게 이 나무야. 나 떠나도 그대로겠지.” 올해도 북에서 부는 봄바람에 꽃가루가 실려 와 고목에 새 생명을 틔웠으리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노란빛 찬란한 결실이 남쪽 하늘을 덮을 것이다.


무학리 천년 은행나무 아래,
마을 주민 황순숙 할머니.
지금도 한 살 때 북으로 간 아버지가 그립다.


망향대에서 바라보는 바다.
철책 너머 황해도 연백까지 거리는 단 2.5km다.


교동이발관 23.5×19.5(cm) 한지 위에 펜 2020
대룡시장은 철책 너머 70여 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7년 전 섬에 다리가 놓이면서, 세월 따라 늙어가던 이곳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멈춘 시계, 그래도 흐르는 시간

땅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북에서 온 피란민들은 당장 먹고살기 위해 차가운 길바닥에서 이것저것 팔았다. 대룡시장의 시작이다. 시장 골목엔 약국 아닌 약방이 있다. 나의환(89), 방은녀(88) 부부는 40여 년 긴 시간 사이좋게 ‘동산약방’을 꾸려왔다. 자식들을 어릴 때부터 뭍으로 보내 딸은 뉴욕시립대 병원 의사로, 아들은 의대 교수로 키워냈지만 정작 당신들은 섬을 떠나 산 적이 없다. 그러다 몇 해 전 할머니가 수술을 받고 몸을 돌보기 위해 자식이 있는 서울로 갔다. 그 혼자 남았다. “큰 병원에 가야 산다고 했어. 할머니는 그래서 없어. 나도 곧 가겠지. 사람 사는 게 그래. 이게 인생의 순리야.”
1967년 약업사 자격증을 딴 할아버지는 섬사람들에게 의사만큼이나 믿음직한 존재였다. 도시에서는 흔한 의원 하나 없지만, 그가 건네주는 약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얻고 안도했다. “혓바늘 돋은 데 먹는 약 있어요?” “지금은 떨어져서 없어. 한 닷새는 있어야 해.” “아휴, 뭐 참아야지. 밥 잘 먹고 건강해야 주사(코로나19 백신)도 맞는데.” 며칠 전엔 난정리 이장 부인이 와서 영양제를 사 갔다. 몇천 원이 부족해 외상하고 곧 오겠노라며 가게문을 나섰다. 하긴 그래야 이웃 간에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본다. 섬의 유일한 약방은 오늘 동네 사랑방이 됐다. 그거면 충분하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교동이발관’엔 얼마 전 바리캉 소리가 멈췄다. 지광식(81) 할아버지는 열다섯 나이에 살길을 찾아 이발소로 왔다. 청소하고 물 기르고 손님들 머리를 감기며 한 달 내내 일해봐야 담뱃값도 안 되는 돈이 손에 쥐어졌다. 3년이 지나서야 이발사가 가위 잡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후로 20년을 한자리에서 묵묵히 일했다.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쌀 200가마니를 주고 가게 주인이 됐다. 당시 교동도엔 이발소가 예닐곱 군데 있었지만 이 집이 제일 잘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인적이 드물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강호동과 은지원이 머리를 자른 곳으로 방송을 타면서 다시 사람들로 붐볐다. 멀리 서울에서까지 찾아오는 단골도 생겼다.


죽는 날까지 가위질할 줄 알았는데 신장병이 왔다. 이틀에 한 번 노쇠한 몸으로 혈액 투석을 견뎌야 한다. “아이들은 내 병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지 알아. 나 하나 때문에 두 가족이 육지와 섬을 왔다 갔다 하네. 자식들에게 미안해.” 도시에 사는 두 딸은 일주일에 5일은 고향집으로 와 아버지 곁을 지킨다. 10년 전,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암과 싸울 때도 꼬박 2년을 섬과 육지를 배로 오가며 지극 정성으로 돌본 효녀들이다.
“자식이니까, 당연히 하는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시면 덜 울려고요.” 언니 오빠와 나이 차이가 나는 막내 지용미(49) 씨를 아버지는 특히 예뻐하셨다. 어릴 적 손님이 없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기고 정성껏 말려주던 아버지의 손길이 지금도 느껴진다. 지난해까지도 다 큰 딸의 앞머리를 잘라주셨다. 아버지 몸에 밴 향긋한 면도 거품 냄새, 쉬이 지워지지 않을 삶의 기억이 텅 빈 이발소 안에 머문다.



실향민에게 제비는 분단선 너머 고향 소식을 전하는 귀한 손님이다.


아내를 요양원으로 보내고, 홀로 동산약방을 지키는 나의환 할아버지.



그리고 4년 전, 아내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


머무른 시간이 깊어질수록 고향 그리는 마음은 짙어져만 간다.
알고 있다. 이젠,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남쪽 땅 그들 곁에도 가족이 있다.

교동이발관’집 사람들. 증손자 방리하, 큰딸 지용려, 아버지 지광식, 작은딸 지용미(시계 방향으로).

 딸들은 아픈 아버지 곁을 지키려고, 문 닫은 이발소 한쪽에 작은 분식집을 차렸다.



교동 고양이 25×15(cm) 한지 위에 펜 2020
망향대 언덕 아래 집.
아흔네 살의 할머니와 하얀 고양이, 어린 강아지가 함께 산다.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던 할머니는, 혼자 힘으로 악착같이 벌어 쌀 일곱 가마니를 주고 이 집을 샀다. 


망향대 언덕 아래, 할머니 집

지석리 북쪽 바닷가 언덕엔 망향대가 있다. 남북을 사이에 둔, 단 2.5km의 바다. 교동도의 마지막 이발사 지광식은 열세 살 때 목선을 타고 그 바다를 건너 교동도로 왔다. 그는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면 이 언덕에 오른다.
가깝고도 먼 북녘땅이 망원경 안으로 들어온다. 날 좋으면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다 보이는데 오늘은 황사가 심해 시야가 흐릿하다. “저기가 내 살던 동네야. 몇 해 전,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건물을 새로 세웠어. 뭐랄까, 가슴이 서늘했어.”
젊은 시절 잠시 외항선을 탄 것 말고는 섬을 벗어나 산 적이 없다. 바다 건너 바로 눈앞에 살던 동네가 보였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이 땅을 떠날 수 없었다. 이제 함께 피란 온 친구들은 모두 저세상으로 가고 그 혼자 남았다. 기대는 체념이 되어갔다. “괜찮아. 나 죽고 통일이 되면, 우리 아들딸이 나 대신 찾아가 주겠지.”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남당리 장수동. 자식들 가슴에도 선명히 새긴, 결코 지우지 못할 아버지의 고향집 주소다.


망향대에서 내려오는 길, 지붕을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집 한 채가 보인다. 아흔네 살의 할머니와 하얀 고양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강아지가 그 집 지붕 아래 산다. 모처럼의 인기척에 묶여 있는 강아지가 좋아라 제자리에서 깡둥깡둥 뛴다.
“뭘 보려고 왔대?” “한 화가가 할머니 집을 예쁘게 그려서요. 누가 사나 궁금했어요.” “집은 우스운데 그림은 참 곱네.” 양미분(94) 할머니는 전라북도 정읍이 고향이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그 땅에선 도저히 숨쉴 수 없어 도망치듯 떠났다. 고무 공장이 있는 서울 문래동으로 갔다. 뼈끝 녹아들듯 일해도 혼자 먹고살기도 버거웠다. 중매쟁이가 남자를 소개해 줬다. 북에서 와 대룡시장 방앗간에서 일하는 기술자였다. 그렇게 서른여섯의 나이에 교동도로 왔다.
고단한 삶은 계속됐다. 재혼한 남편은 10년을 함께 살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남기고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헛간이나 다름없는 끄트머리 방에 세 들어 살다 혼자 힘으로 이 집을 마련했다. “주인이 집을 허문다고 하길래 나 달라고 했지. 집 같지도 않은 걸, 쌀 일곱 가마니나 주고 샀어.” 그래도 이 집이 있어서 아들 키우며 끈질기게 삶을 지탱해 왔다.
“나 고생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어. 그래도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 고생한 보람이 다 아들한테 갔다고 생각하면….” 평생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후회 없이 살아왔다. 없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기억은 있다. 병나서 자식 고생시키지 않고 편히 눈 감는 게,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


유배의 섬 강화도에서 또 유배된 섬, 교동도. 전쟁으로 가난으로 생의 막다른 길에서 숨을 곳을 찾아 흘러들어온 사람들을, 따뜻이 품어주었다. 햇살이 스러지면 섬은 철책을 두른 채 저 멀리 물러나 다시 혼자가 된다. 하지만 그리움은 희망으로, 섬은 외롭지 않다.



다시 육지로 간다. 다리를 건널수록 점점 작아지는 섬.
그 안엔 고향 땅과 가족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남과 북. 단 2.5km의 바다를 사이에 둔 아픈 역사의 간극


그림 속 고양이가 앉아 있던 집.
안은 허물어져가는 창고다.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이름도 없는 고양이와 양미분 할머니



그림 고제민
고제민은 스스로를 ‘인천 작가’라고 말한다. 그에게 인천은 언제든 따듯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이자, 창작 욕구를 쏟아붓게 만드는 또 다른 자아이며, 힘겨운 삶을 버텨낸 사람들의 한숨으로 이루어진 검푸른 풍경이다.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로 <인천, 그리다>, <엄마가 된 바다>, <인천 담다> 등을 출판했다.



첨부파일
이전글
호국보훈의 달-현충탑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
공공누리:출처표시+변경금지 (제3유형)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미디어담당관
  • 문의처 032-440-8305
  • 최종업데이트 2019-10-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