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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문화재 이야기⑦ 자유공원 플라타너스(인천시 등록문화재)

2021-06-29 2021년 7월호

개항 때부터 130여 년간 자유공원 지켜온 아름드리나무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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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청 뒤 남부교육청 앞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샛길이 하나 나온다.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지름길이다. 이 길에 들어서면 어른 두세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는 아름드리 거목이 나타난다. 높이 30.5m, 가슴 높이 둘레 4.7m의 이 나무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플라타너스다. 식재 연도 1884년. 표지석은 이 나무가 뿌린내린 해를 개항 이듬해로 표기하고 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으로 신식 교육, 의학, 종교, 피아노 등 서양 문물이 들어왔다. 많은 외국인이 더불어 제물포 땅을 밟는다. 인천항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응봉산은 외국인들에게 매력적인 땅이었다. 응봉산 자락에 집을 지으면 아름다운 제물포 앞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파티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높이 69m의 아담한 응봉산에 외국인들이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했다. 제각기 좋은 자리를 차지한 외국인들은 이제 집주변에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각국공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북미가 고향인 플라타너스는 이 시기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6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수령을 감정한 강진택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1883년 개항 직후 미국이나 영국에서 가져온 국내 최초의 플라타너스로 추정된다”며 “외형이 수려한 데다 인천상륙작전 때도 원형을 유지한 채 살아남아 근현대사를 담은 나무라는 점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는 현재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예고됐으며,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 중이다.
각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1914년 지계제도가 폐지된 이후 만국공원이란 이름을 썼으며, 1930년대 이후엔 서공원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광복 이후 다시 만국공원이라 불렀으나 1957년 인천시가 주변을 재정비하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해 개천절에 맥아더 동상 제막식도 열렸다.
자유공원은 우리나라의 굵직한 역사를 품고 있기도 하다. 1882년 5월 22일 자유공원 초입 언덕에선 조선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 전권공사 슈펠트Shufeldt 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서구 열강과 최초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치외 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인정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4월 2일 자유공원에선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다. 만오 홍진 선생이 주도한 13도 대표자 회의는 4월 11일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잉태한 역사적 회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자유공원은 오래도록 인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맥아더 동상 뒤쪽과 100주년 기념탑에서 과자 봉지를 펼쳐놓고 막걸리를 나눠 마시던 기억,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광장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던 추억을 갖고 있다. 공원 안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있고, 주변에 홍예문과 제물포구락부, 인천기상대, 인천의 명문 제물포고등학교도 자리한다.
나무 앞에 서자 무성한 잎들이 초여름 산들바람을 타고 쏴쏴 소리를 낸다. 저건 혹시 플라타너스가 살아온 130여 년의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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