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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독립 40년, 오래된 미래 새로운 역사

2021-06-30 2021년 7월호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인천 독립 40년’을 맞아 시민 공간으로 피어난 ‘인천시민愛집’과 ‘이음1977’,  그 가까이에서 130여 년 인천 바다를 지켜본 플라타너스를 김재열 화백이 그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임 학현 포토디렉터


송학동 옛 시장 관사 42x30(cm) 2021

시민 가슴愛 지은 ‘인천시민愛집’. ‘인천 독립 40년’을 맞아 시민에게 품을 연다.


역사의 시간, 

공간의 기억
‘뚜드럭뚜드럭’ 망치질 소리가 고요한 응봉산 기슭을 두드린다. 송학동 옛 시장 관사를 새 단장하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손길 닿을수록 먼지 자욱이 쌓여가던 옛집이 제빛을 찾고 윤기를 더해간다. ‘인천 독립 40년’. 1981년 7월 1일, 인천이 경기도에서 벗어나 직할시로 승격했다. 2021년 7월 1일은 인천이 당당히 홀로 선 지 딱 40년 되는 날이다. 그 시간을 기리며 송학동 옛 시장 관사가 시민이 지은 이름 ‘인천시민愛집’으로 태어나, 시민 품에 안긴다.




1930년대 코노 다케노스케 별장 시절 모습 (사진제공 인천발전연구원)


시민이 지은 이름 ‘인천시민愛집’으로 단장한, 송학동 옛 시장 관사


1883년 1월 1일, 낯선 배가 인천 바닷가에 닿았다. 바다 건너온 파란 눈의 사람들이 응봉산 중턱 송학동에 터를 잡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동네였다. 188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 공원인 각국各國공원이 들어서고, 1901년 외국인들의 사교장 제물포구락부가 세워졌다. 각국공원은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서고, 제물포구락부는 서울 정동구락부보다 3년 먼저 세워졌다. 대한민국 새 역사의 첫 페이지를 인천이 힘차게 열어젖혔다.


공간엔 머물다 간 사람들의 삶이 흐르고 역사가 쌓인다. 송학동 옛 시장 관사는 1901년 일본인 사업가 코노 다케노스케(洞野竹之助)의 별장으로 처음 세워졌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그림 같은 집이었다. 광복 이후엔 서구식 레스토랑 ‘동양장’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엔 사교장 ‘송학장’으로 쓰였다. 문화재위원이자 국악평론가인 윤중강(62)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국악인들이 공연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아악雅樂을 전수하기 위해 세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아악수장이자 국립국악원 원로 사범이었던 김천흥, ‘쑥대머리’로 유명한 명창 임방울 등이 소리판을 벌였다. “억압받던 시대에 예술로 민족의 혼을 지탱해 내던 역사적 장소입니다. 인천만의 고유한 가치를 온전히 지키며 이어가야 합니다.”


송학장에서 소리를 하는 임방울


명창의 소리 울려 퍼지던 ‘인천시민愛집’에서 윤중강


삶의 공간,

열린 쉼터로
송학장 시절만 해도 집은 원형 그대로를 유지했다. 우아한 서양식 건물과 일본식 정원으로 공들여 가꾼 의양풍擬洋風 집이었다. 일본 색을 벗고 고풍스러운 한옥의 형태를 갖춘 건 시장 관사가 되면서부터다. 인천시는 1966년 집을 사들여 새로 지어 2001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사용했다. 열일곱 명의 역대 인천시장이 이 안에서 인천의 내일을 준비하며 눈뜨고 때론 밤을 지새웠다. 


송학동 옛 시장 관사 대문에서 김영선, 장달순 부부. 대문은 1930년대 지은 원형 그대로다. 바로 그 옆에 그들 집이 있었다.


김영선(80), 장달순(74) 부부에게 송학동 옛 시장 관사는 집이자 일터였다. 1981년, 인천이 직할시가 된 해에 서울에서 자유공원 아래로 왔다. 남편은 관사를 지키고 아내는 살림을 도맡았다. 김 씨는 인천시 1호 청원경찰로 일을 시작해 2001년 정년을 마쳤다. 20년 동안 여덟 명의 시장을 모셨다. 시장이 아닌 시민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다. 차고 한편에 지은 경비실 단칸방에서 부부는 오순도순 희망을 키워갔다. 그들 웃음이 묻어나고 눈물이 배어나는 자리는, 누구든 머물며 몸과 마음을 고르는 쉼터가 됐다.




고졸한 멋이 흐르는 송학동 옛 시장 관사.

겹겹이 쌓인 기와지붕 위로 초여름 햇살이 떨어진다.


“보는 사람마다 ‘아저씨, 아줌마 좋은 곳에서 일하네요’라며 부러워했지요. 20년 동안 살면서 좋은 기억밖에 없어요. 행복했습니다.”
창 너머로 인천항 불빛이 하나둘 반짝이면, 일할 때는 몰랐던 하루의 고단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다음 날 일어나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부부는 매일 살아갈 힘을 얻었다.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됐는데, 아직 집처럼 편해요. 여기 오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좋은 기억을 남기고 추억을 새기면 좋겠습니다.” 밤낮으로 관사를 지키던 대문 옆 좁은 경비실은 누군가에겐 집이었다. 사람은 떠났지만 쉬이 지워지지 않을 삶의 향기가 그 안에 머문다.


‘인천 독립 40년’을 맞아

송학동 옛 시장 관사가

시민이 지은 이름 ‘인천시민愛집’으로 단장해,

시민 품에 안긴다.


이기상 저택 51x36(cm) 2021
인천도시공사가 복합문화공간 ‘이음1977’로 새 숨을 불어넣었다.


이웃집

 ‘이음1977’
송학장에 이두칠의 대금 독주곡 ‘청성곡’이 울려 퍼지던 시절, 담장 너머엔 초대 인천시립박물관장이자 미술가 이경성이 살았다. 두 사람은 가깝게 지냈다. 훗날 집주인은 이경성에서 영진공사 고 이기상 회장과 부인 공경화(85) 여사로 바뀌었다. ‘꿈에 그리던 집이었다.’ 아내는 김수근이 지은 소극장 ‘공간 사랑’을 우연히 찾고는 마음을 빼앗겨 그에게 집 지어주기를 청했다. 그 정성에 이끌려 집터를 보러 온 김수근은 ‘인천에 이렇게 좋은 터가 있는 줄 몰랐다’라며 놀라워했다. 인천에 김수근의 손길이 스민 건축물은 이 집과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단 두 곳뿐이다.




‘이음1977’로 새 숨을 튼 고 이기상 저택.

고인은 ‘내가 떠나도 이 집은 반드시 지켜달라’ 당부했다. 그 뜻은 이뤄졌다.


“김수근 건축가가 아름다운 집을 짓기 위해 애를 많이 썼지요.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설계대로 짓지 않으면 허물고 다시 짓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공사 중간중간 와서 지켜볼 만큼 애정을 쏟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정미소 건물 벽돌을 가져다 정성스럽게 내벽을 쌓아 올리고, 전돌로 외벽을 견고히 마감했다. 기초 공사만 6개월, 꼬박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부부는 이듬해 집에 들어가서도 계속 쓸고 닦고 정성을 들이며 38년을 살았다.
“이 집에 살면서 좋은 기억만 있어요. 아들 하나 딸 둘 잘 키워내고 남편 하는 사업도 잘됐으니까요.” 뒤로는 자유공원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눈앞엔 인천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평생 인천 바다와 맞닿아 살아온 남편이 집에서 망원경으로 인천항을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살아생전 인천항 발전에 이바지한 고 이기상 회장은 ‘내가 떠나도, 이 집은 당신이 반드시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그 뜻을 헤아리면서도 쉽게 답할 수 없었다. 2년 전, 인천도시공사가 집을 사들여 복합문화공간 ‘이음1977’로 새 숨을 불어넣었다. 고인의 뜻을 받들 수 있어서 남겨진 아내는 고맙고 다행스럽다. “큰 행운이에요.”


공간을 짓는 것도 채우는 것도 사람이다. 이애정(58) 서담재 관장을 중심으로 지역 예술가와 활동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음1977’을 1년간 시범 운영했다. 내밀한 사적 영역을 모두의 공간으로 여는 귀한 시간이었다.
“2021년 7월 1일,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한 지 40년 되는 날, ‘이음1977’과 ‘인천시민愛집’이 문을 엽니다. 인천시가 역사학적으로 또 건축학적으로 가치 있는 공간을 발굴해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지요. 그 첫 단추가 잘 채워져 의미 있는 움직임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자유공원 아래에서 추억을 짓고 기억을 세운, 공경화 여사(왼쪽)와 이애정 서담재 관장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56×76(cm) 2021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 130여 년,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거스르면 개항기와 맞닿는다.



뿌리 깊은 나무,

이미 시작된 미래
언덕을 내려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있다. “나무가 엄청나게 커요. 하늘까지 닿을 것 같아요.” 자유공원 아래 ‘비둘기 어린이집’ 아이들이 지나가며 나무에게 말을 건넨다.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거스르면 개항기와 맞닿는다. 강진택(52) 국립산림과학원 연구관은 나무의 수령을 130년 이상으로 추정하며, 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연유산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2015년 플라타너스가 보호수로 지정되고 올해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예고되는 순간마다 함께해 왔다.


나무는 살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6·25전쟁으로 포탄이 쏟아지는 한가운데도, 1987년 태풍 ‘셀마’가 불어닥쳤을 때도 쓰러지지 않았다. 훗날 바다 경관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오래된 나무 대부분이 잘려 나갈 때도 끝까지 버텨냈다. 갖은 풍파를 겪어 거칠어진 몸뚱이를 가만히 쓰다듬고, 살아온 시간을 가늠해 본다. 몇 번을 올려다보았는지 모른다. 긴긴 세월을 보듬은 고목에도 새잎은 돋아나고 있었다.


'인천 독립 40년’ 시민자문단 단장인 황규철 인천사랑시민협의회 회장


“나무는 긴 굴곡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 왔습니다. 꿋꿋이 나뭇가지를 뻗어가고 깊게 뿌리내려 왔지요. 천년 나무로 인천의 미래와 함께해 주길 바랍니다.”
이 동네 가까이에서 나고 자란 황규철(68)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은 큰 나무를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최근 ‘인천 독립 40년 행사’ 시민자문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이 일대에 대한 마음이 더 각별해졌다. 플라타너스가 인천시 등록문화재로 예고되고,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에 감회가 뭉클 솟는다.
“130여 년 한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이 땅에 살아가는 아이들이 지역에 자긍심과 애정 어린 마음을 키우길 바랍니다. 먼저 인천 어른들이 잘 이끌어야겠지요.”
초여름 햇빛의 농도가 쌓이면서, 싱그러운 잎사귀가 하늘을 덮었다.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짙푸르게, 나무가 빛나고 있다. 나이테를 촘촘히 그리고 더 단단히 뿌리내리며, 인천은 이미 다가올 미래를 준비했다. ‘인천 독립 40년’. 오늘 인천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그림 김재열
인천예총 회장,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교수 등을 역임한 인천의 원로 작가다. 인천 구석구석의 풍경과 건물에 내재한 가치를 캔버스에 담는다. 18회에 걸쳐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NIB남인천방송 ‘인천 여행 스케치 기행’, 인천일보 ‘풍경 드로잉’을 연재하며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현재 인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 고문, 대한민국 수채화 작가 원로회 의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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