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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 문화재 이야기⑨ 소래 협궤용 증기기관차(인천시 등록문화재 제4호)

2021-09-01 2021년 9월호



서민의 애환 싣고 인천~수원 달린 꼬마열차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덜컹덜컹, 흔들흔들…’
협궤 열차는 염전, 소래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 가운데 하나다. 마주 앉으면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열차 크기도, 철로 폭도 작기 그지없어 꼬마열차라고도 불렸다. 열차가 기우뚱거리면 객실에선 참외며 사과 같은 과일들이 굴러다녔고, 젓갈과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기 일쑤였다.
용현동 ‘똥고개’를 넘을 때면 낑낑대는 바람에 학생들이 뛰어내려 뒤에서 밀었다느니, 버스와 부딪혀 기차가 나자빠졌다느니 하는 얘기가 기차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서민의 애환을 싣고 달리던 협궤 열차가 처음 기적을 울린 때는 1937년이다. 일제는 1930년 소래에 염전을 조성한 데 이어 철도(수인선)를 부설했는데 이 소래염전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금은 탄약의 중요한 재료였으므로 태평양전쟁을 치르던 일제에겐 반드시 필요한 물자였다.
1935년 9월 23일 민간 철도 회사인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는 인천~수원 간 철도 부설권을 인가받는다. 1936년 5월 16일 시작한 철도 공사는 1937년 8월 6일 완공됐는데 철로의 폭이 경인선의 절반(76.2cm)에 불과했다. 협궤 열차는 소래, 남동, 군자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부지런히 인천으로 실어 날랐다. 앞서 경기도에서 생산한 쌀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했던 수려선(수원~여주)을 인천항으로 연결하는 역할도 했다. 광복 이후 협궤 열차는 잠깐 동안 미군들의 기름 수송용으로 쓰이다가 1946년 국가에 귀속되면서 국철로 다시 태어난다. 
협궤 열차가 ‘느려지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이다. 교통수단이 다양해지면서 협궤 열차 이용객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1973년부터 ‘송도~수원’ 구간만 운행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수인선은 이후 고속버스 등에 밀려 하루 평균 이용객이 60명까지 떨어졌다. 3년간 60억여 원의 적자를 내던 수인선은 결국 1995년 12월 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인천시 등록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소래역사관 앞 광장의 ‘협궤용 증기기관차(혀기-7형)’는 1952년 수원 기관차 사무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안내판엔 1927년 6월 14일 조립했다고 적혀 있어 정확한 시기를 알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무게 42.95t, 길이 14.6m, 높이 3.2m, 폭 2.3m의 이 증기기관차는 디젤동차로 바뀐 1978년까지 수인선 철로를 달렸다.
협궤 열차가 떠난 자리에 열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한 때는 2012년이다. 이때 송도역~오이도역 13.1km 구간 운행을 시작한 수인선은 점차 운행 구간을 늘려오다 2020년 9월 총연장 52.8km의 전 구간을 재개통했다. 사업비만 2조74억원이 들어간 대역사였다.
수인선 열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꼬마열차는 문화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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