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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우크라이나人 사바찐과 제물포구락부

2022-05-02 2022년 5월호


우크라이나人 사바찐과 제물포구락부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제물포구락부 실내,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발음이다.


자유공원 응봉산 중턱. 봄바람을 타고 연분홍 벚꽃잎이 ‘제물포구락부’ 맨사드 지붕 위로 나풀나풀 내려앉는다. ‘로마시티-제물포구락부에서 떠나는 로마 역사여행.’ 제물포구락부에선 지금 올해 첫 기획전시가 한창이다. 로마가세계로 출발하는 글로벌 도시였다면, 제물포는 근대 조선이 시작된 국제도시였음을 드러내려는 취지라고 관계자는 설명했다. 종교, 교육, 음악과 같은 서양 문물이 제물포로 처음 들어와 서울로 전해졌으므로 ‘인천은 우리나라의로마’라는 관점이다.
짙은 밤색 톤 나무로 마감한 실내와 봄 햇살이 들어오는 아치형 창문, 그리고 귀부인의 장식품 같은 천장의 샹들리에. 제물포구락부 건물 내부는 개항기 외교관들의 협의 공간이자 사교 클럽답게 고전적 화려함으로 치장돼 있다. 제물포구락부는 인천 개항과 함께 밀물처럼 들어온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제물포에 세계 각국의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를 설정하면서 서구 열강은 공동 이익을 위한 ‘신동공사’란 이름의 회사를 설립한다. 신동공사는 당시 근대건축가로 널리 알려진 우크라이나 출신 사바찐 (Afanasii Ivanovych Seredin-Sabatin, 1860~1921)에게 설계를 의뢰한다. 그렇게 1901년 6월 22일 문을 연 제물포구락부는 외국인들이 술 마시고 당구를 치는 사교 클럽처럼보였지만 실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진 회의장이었다. <제물포 각국 조계지 회의록>(인천학연구원)에 ‘제물포정략’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이권 다툼은 치열한 것이었다.
사바찐은 구한말 조선의 근대건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우크라이나의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제물포 땅을 처음 밟은 때는 1883년이다. 전문 건축 교육을 받지 못한 단순한 기술자였음에도 건축에 재능이 있던 그는 부두 축조 공사와 함께 인천해관 청사, 세창양행사택을 지으며 조선 조정의 신임을 얻는다. 각국 조계지와 각국 공원(현 자유공원)도 그의 작품이다. 이어 서울로 간 사바찐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1년 동안 지낸 러시아 공사관, 경복궁 관문각, 독립문, 덕수궁 정관 헌, 중명전, 손탁호텔을 설계했다.
사바찐은 을미사변(1895) 당시 경복궁 건청궁에서 있었 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러일전쟁(1904) 이후 그는 조선을 떠나 러시아 곳곳을 방랑하다 1921년 쓸쓸히 눈을 감는다. 그로부터 한 세기를 건너온 2022년, 사바찐의 조국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푸틴의 침공으로 풍전등화에 놓였다.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사바찐. 그의조국 우크라이나에 여름 해바라기처럼 환한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한다.


2022년 4월 제물포구락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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