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역사

한국전쟁의 영웅을 만나다

2022-05-31 2022년 6월호

한국전쟁의 영웅을 만나다

그들이 있었기에 빛나는 인천, 대한민국


우리나라의 인후咽喉 인천. 몽골 침입부터 병인양요, 신미양요, 인천상륙작전, 연평해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의 무대는 항상 인천이었다. 그때마다 목숨을 바쳐 한반도를 지켜낸 순국선열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빛나는 인천을 살아가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도전에 응전해 빛나는 역사를 만들어간 인물과 장소를 찾아갔다.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




김영환 참전상이군인은 백석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다.
참전용사들이 목숨 걸고 지킨 조국은 세계적인 군사·경제대국이 됐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만난 고융희 참전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장.
육군첩보부대 HID, 미 극동사령부 산하 켈로 특수부대 소속으로 무수한 전투를 치렀다.


“총알이 사람을 피해야지,
사람은 총알을 못 피해. 목숨 걸고 싸웠지.”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평화롭게
이 땅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아흔살이 된 인천학도의용대 참전용사들. 김태영, 김현생, 임명환(왼쪽부터).
1950년 12월 18일, 인천의 남녀 학생 3,000여 명이 전쟁터로 행군했다.

목숨 걸고 조국을 수호한 참전용사
“개성, 토성, 백마산… 지금도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다 그려져. 그 자리, 가고 싶다고 거기를. 나 죽고 나면 아무도 없어. 지금이라도 시신을 수습해야 해.” 고융희(88) 참전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장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생각하면 눈물만 쏟아진다. 1951년 8월, 열일곱 살에 육군첩보부대인 HID에 입대해 이북을 수없이 드나든 그다.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서 병력과 민간인 상황을 파악하는 임무였어. 절반 이상은 못 나와. 나도 백마산 옆에 130고지에서 포위당했다 도망쳐 나왔어.” 밤새 달려 동틀 무렵, 간신히 부대가 있던 파주로 되돌아왔다. 이듬해부터 그는 미 극동사령부 산하 켈로(KLO) 특수부대 소속으로 무수한 전투를 치렀다.
김영환(89) 참전상이군인은 백석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다. “총알이 사람을 피해야지, 사람은 총알을 못 피해. 목숨 걸고 싸웠지.” 백석산 전투(1951년 8~11월)는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이 양구군 북방 백석산을 지켜낸 전투로, 수만 명에 달하는 용사들이 전장에서 산화했다. “눈 녹여서 밥 해 먹고 그랬어. 우리 어릴 땐 상상도 못했는데,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한 걸 보면 자랑스럽지.” 그들이 지켜낸 땅에, 대한민국이 기적을 일궈냈다. 역사를 바로 알고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자유공원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연필 대신 총을 든 인천학도의용대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 그런 생각으로 학생들이 학도병을 조직해 순찰하며 시민을 지켰어.” 김현생(90) 인천학도의용대 회장은 펜을 들어야 할 열여덟 살에 총을 들었다.
1950년 12월 18일, 축현초등학교 운동장에선 ‘인천학도의용대 출정식’이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밤새 걸어서 다음 날 오전 10시경 도착한 곳은 수원이었다.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추위에 부모님이 싸 주신 주먹밥은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대구로 가는 화물차에 사람들이 짐짝처럼 실려 갔어. 화통, 지붕에도 매달려서. 마산에 닿은 때가 이듬해 2월 29일이야. 가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2,000명밖에 도착 못 했어.” 해병대에 입대한 김 회장은 고된 훈련을 받고 서부 전선, 중부 전선 전투에 참전했다. 924고지(일명 김일성고지)에서 허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끝까지 싸우다 휴전 후 제대했다.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일 테지. 지금 세대는 좋은 기억만 갖고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어.” 조국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부모님 곁을 떠나 나라를 지킨 세대들. 자신의 상처보다는 후손의 미래를 더 걱정한다.



지난해 11월, 71년 만에 월미공원에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가 세워졌다.
정지은 씨(왼쪽)와 이범기 씨가 고인이 된 가족, 친구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제가 위령비를 세우고 왔어요’라고
말해야죠….”


‘실향민’이 된 월미도 주민
“어머니가 맨손으로 잿더미를 파헤쳐 시신을 찾았는데, 얼굴이고 옷이고 새까맣게 타버려서 입을 벌려 금니를 보고 아버지인 것을 알았대요.”
1950년 9월 10일부터 14일까지 월미도는 잿더미가 됐다. 당시 여섯 살로 전쟁고아가 된 정지은(78) 씨는 쏟아지는 눈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통에 아버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어머니는 바다에서 조개를 캐다팔고, 아홉 살이던 형은 구두닦이 통을 메고 거리로 나섰다. 평생 못 배우고 배고프게 살았다.
지난해 11월 2일, 71년 만에 월미공원 제물포마당에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
비’가 세워졌다. 마을이 있던 자리다.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제가 위령비를 세우고 왔다’고 말해야죠. 고향 집과 아버지 땅은 아직 못 찾았지만….”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최용규 인천대 이사장, 최재형 선생의 4손 최일리야(왼쪽부터)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태룡 소장이 최일리야씨에게 최재형 선생의 공적이 기록된 사료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어도 배우고, 할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어서 감사해요.
전 세계에 흩어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저처럼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어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후손
안중근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60~1920) 독립운동가의 4손 최일리야(21) 씨가 인천에 온 건 지난 2019년이다. 인천대가 그를 찾아내 초대하자, 러시아에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최 씨가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그는 현재 인천대 전자공학과에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어도 배우고, 할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어서 감사해요.”
그의 바람은 인천에도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공간이 생기는 것.
“러시아 우수리스크 지역에 ‘최재형 고택 기념관’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해외에서 순국한 애국지사들을 기리고 가요. 전 세계에 흩어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저처럼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자랑스러워 했으면 좋겠어요.”



안중근과 함께한 러시아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최재형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제거한 총알은 최 선생이 제공한 8연발 브라우닝 권총에서 나왔다. 연해주에서 러시아 군대에 소고기 군납업을 하며 부호가 된 그는 연해주의 애국지사, 의병들을 물심양면 도운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다. 1907년, 최재형은 망명한 안중근을 만나 이듬해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했다. 본인이 총장, 안중근은 평의원에 선출돼 단체를 이끈다.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 머무는 동안 뒷마당에서 사격 연습을 했고 1909년 비밀 결사체인 ‘동의단지회’를 조직, 12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斷指同盟 한 곳도 그의 자택이었다. 재정난 탓에 폐간된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 후 재발행해 격렬한 논조로 일본제국을 비판했다. 한인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32개나 되는 학교를 세워 어려운 고려인 동포를 따뜻하게 품었다.


취재영상 보기



첨부파일
이전글
호국보훈의 달 특집 2 -월미도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
공공누리:출처표시+변경금지 (제3유형)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미디어담당관
  • 문의처 032-440-8305
  • 최종업데이트 2019-10-28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