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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케치에 비친 인천 - 소래포구

2022-10-04 2022년 10월호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따라 인천 사람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생명력 넘치는 소래 바다, 짠  내 가득한 풍경을 길현수 화백이 담았다.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품듯, 소래를 그리고 그린 시간이 20여 년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전재천 포토 디렉터



소래일기 동행 10P, 53.0×40.9cm, Oil on Canvas
길현수 화백에게 소래는 따스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이자,
고단한 삶을 희망으로 버텨낸 사람들의 검푸른 풍경이다.


20년 사랑의

그림일기 

자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소래의 맨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새벽 세 시, 어둠 한가운데를 달려 포구로 갔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안고. 검은 바다는 고요하다. 왁자하던 포구가 어둠에 덮여 여백을 드리운다. 세상 모든 것이 잠든 이 시간에도, 소래 사람들은 깨어 있다. 바닷가에서 얼크러진 그물을 매만지고, 어물전 가판을 정리하며 일찍이 하루를 준비한다. 출항을 기다리는 크고 작은 배들 사이엔 분주함이 새어난다. 소래 사람들은 햇살보다 먼저 새벽을 깨운다.


지독히 사랑해서, 길현수(60) 화백은 소래를 그린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에도 다리 아래 숨어들어 기어코 화판을 폈다. 며칠이고 갯벌에 뒤엉켜 붓을 놓지 않았다. 그 시간이 20여 년이다. “연인처럼 늘 그립고 보고 싶어요. 아름다운 저 바다,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후미진 곳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폐어구들조차 제겐 예사로 보이지 않아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찾은 소래포구 어시장. 순간 훅 끼치던 비릿한 냄새, 아낙들이 머리에 인 바구니엔 갓 잡아 올린 날것들이 파닥거렸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훗날 작가가 되어 다시 만난 소래를 매일 밤낮으로 화폭에 담았다. 마음이 깊어져갔다. 5년 전 어시장이 화마에 휩싸여 그림 속 풍경이 스러져 사라졌을 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랑하던 존재와 시간의 상실이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소래를 찾지 못했다.


소래의 맨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
새벽 세 시, 어둠 한가운데를 달려 포구로 갔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안고.



소래일기 Feeling 30F, 72.7×90.9cm, Oil on Canvas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에도 화판을 폈다.
갯벌에 뒤엉켜 붓을 놓지 않았다.



2009년 소래포구 전경, 지금과 또 다른 모습이다.


​20여 년, 소래를 한결같이 사랑하며 화폭에 담아온 길현수 화백




오늘,

새로운 소래

바로 앞까지 도시가 침범했는데도 포구는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바다는 여전히 날것 그대로 생명력 넘치고, 사람들은 부단히 오늘을 살아낸다. “어린 시절 기억 너머의 소래는 지금 없지만, 마냥 그립지만은 않아요.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로 채워진 이 일대도 한때는 물기 어린 땅이었다. 작가는 오늘,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수평적 이미지에 애정 어린 시선을 던진다.


소래포구는 인천은 물론 수도권 사람들도 즐겨 찾는 전통 어항 명소. 내일, 더 밝게 빛난다. 해양수산부는 2017년 이 일대를 국가 어항으로 지정하고 올해부터 ‘소래포구항 건설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2026년 준공이 목표다. “소래포구는 도시 한복판에 있는데도 굉장히 낙후돼 있었습니다.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면서 이제야 소래철교의 교량 상판을 높여 어선이 원활하게 오 가고, 정박장도 순조롭게 조성하고 있지요. 이제 시작입니다.” 수평선 너머를 향한 고철남(57) 소래어촌계장의 눈빛에 헤아리기 힘든 감정이 묻어난다.


바다는 누군가에겐 삶의 최전선이다. 처음엔 싸워 이겨보려 했지만,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바다는 고마운 존재이자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삶의 터전이다. “평생 시린 새벽바람 맞으며 사는 인생, 아이들은 우리보다 고생을 덜 해야지요.” 그의 바람처럼,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다시 아버지에게서 그물을 물려받은 젊은 뱃사람 들은 펄럭이는 깃발에 만선을 꿈꾸며, 오늘 더 큰 바다로 나아간다.



귀항이다. 새벽, 네 시에 닻을 올린 ‘천광호’가 꼬박 열두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포구에 다다른다.

항해를 마친 김윤경 선장, ‘천광호’ 조타실에서. 고된 하루에 이제야 쉼표가 찍힌다. 


바다로 간,
아버지와 아들

귀항이다. 새벽, 네 시에 닻을 올린 ‘천광호’가 꼬박 열두 시간 만에 포구로 돌아왔다. 가을 꽃게 철이라지만, 연이은 풍랑주의보로 요즘 뱃일이 녹록지 않다. 오늘도 물결이 높아서 먼바다로는 배가 나가지 못했다. 


“오늘 작업은 좀 힘들었어요. 좋을 땐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데, 냉정할 땐 또 한없이 휘몰아치는 게 바다예요.” 40년 뱃길 인생에도 바다가 두려울 때가 있다. 김윤경(63) 천광호 선장은 1988년, 스물아홉 나이에 아버지 배에 올랐다. 함께 고단한 삶을 억척같이 살아내면서도 배 타는 아버지 걱정만 하는 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인생의 항로가 정해졌다.


아들 김영수(29) 씨는 바다 위 삶을 숙명처럼 스스로 짊어졌다. “아버지, 저 배 탈게요.” 어느 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아들이 불현듯 말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개가 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기어이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이 뱃사람의 운명이다. 어떤 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가 “부디, 험난한 내 길을 따르지 마라” 청하자, 아들은 “바다에 한번 나가본 후에 생각해 볼게요”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3년이 지났다. 오늘도 아들은 파도가 새파랗게 달려드는 바다 한가운데 묵묵 히 버티고 서서, 아버지 곁을 지켰다.


“아버지, 저 배 탈게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3년이 지났다. 오늘도 아들은
거친 바다 한가운데 묵묵히
아버지 곁을 지킨다.



고철남 소래어촌계장, 그의 어선 ‘서해호’에서.
그 역시 20년 키를 잡고 서쪽 바다를 누볐다.


소래일기 Feeling 10F, 53×45cm, Oil on Canvas
바다는 소래 사람들 삶의 최전선. 
펄럭이는 깃발에 만선을 꿈꾸며 바다로, 바다로 나아간다. 


40년 뱃길 인생에도
바다가 두려울 때가 있다.
좋을 땐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데,
냉정할 땐 한없이
휘몰아치는 게 바다다.


​‘천광호’ 사람들이
꽃게를 배에서 내려 경매장으로 옮기고 있다.


​‘천광호’ 김윤경 선장의 아내 김영임 씨.


새벽, 다시
하루의 시작 

“1kg에 1만8,000원.” 흥정 소리가 물기 어린 허공으로 치솟는다. 김윤경 선장의 아내 김영임(60) 씨는 1980년대 충청도에서 소래로 시집왔다. “상수도시설이 없어서 큰 ‘다라이’에 2,000원씩 물을 사서 쓰던 시절이었어요. 그 후로 아침에 눈뜨면 선창으로 달려가고, 해가 지면 바닷가 집에서 잠들고…, 바다 곁에 머물러 살았지요.” 평생 바다와 맞닿은 삶. 나이 육십 고개를 넘으니 젊을 때는 몰랐던 뼈끝 녹아드는 고 통이 하루 피로와 함께 몰려든다. 하나 그보다 더 힘겨운 건, 바다로 간 식구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심정이다. 이른 새벽, 남편을 따라 집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남몰래 눈물 흘리기도 했다.


부단히 붙잡고 있던 삶의 희망이 흔들린 적도 있다. 5년 전, ‘소래포구 전통 어시장’이 화마에 휩쓸려 잿더미가 됐다. 평생 흘린 땀이 스민 삶의 터전이 한순간 사라졌다. 그보다 더 뼈아픈 건, ‘바가지 상인들’이라는 손가락질, ‘어쩌면, 잘됐다’라는 가시 돋친 말들이었다. 아픈 만큼 상인들 스스로 돌아보고 뉘우치고 달라졌다.


올해 가을 꽃게는 풍년이다. 만선이라고 해서 돈벌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고기가 넘치면 가격은 그만큼 내려간다. 하지만 어떠랴. “몸이 더 고단해도 괜찮아요. 우리가 물고기를 잡은 만큼 더 많은 분이 싸게 사서 드시고 행복하면 얼마나 좋아요. 우리는 한동네 사는 이웃인걸요.” 검게 그을린 김 선장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많은 뱃사람의 마음이, 사실 그러하다.
어느덧 세상이 검기울어 간다. 고된 바다 일을 마친 부부는 오붓이 단출한 저녁 식사를 하고 곤한 잠에 빠져들 것이다. 포구의 시간이 그렇게 끝나간다. 하지만 그도 잠시, 새벽빛이 밝아오기 전부터 다시 그들의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소래의 밤은 짧다.


어느덧 세상이 검기울어 간다. 고된 바다 일을 마친 부부는
오붓이 단출한 저녁 식사를 하고 곤한 잠에 빠져들 것이다.
포구의 시간이 그렇게 끝나간다. 하지만 그도 잠시, 새벽빛이 밝아오기 전부터
다시 그들의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소래의 밤은 짧다.




소래일기 14 삶의 꿈 Ⅰ, 72.7×60.6cm, Oil on Canvas
엄마 몸에서 나는 비릿한 바다 냄새.
소래포구엔 지워지지 않을 삶의 향기가 흠씬 배어 있다.



소래일기 흔적 20M, 72.7×50.0cm, Oil on Canvas
평생 바다와 맞닿은 삶,
아침에 눈뜨면 선창으로 달려가고, 해가 지면 바닷가 집에서 잠들었다.



2년 전, 새롭게 태어난 
소래포구 전통 어시장



그림 길현수

풍경과 인물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가다.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미술대학원을 수료했다. 인천에서 태어나 대학에 다니기 전까지 줄곧 고향에서 지냈다. 20여 년 전부터 일기를 쓰듯 소래와 일상을 함께해왔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수평적이미지의 소래포구를 그리며 앞으로 남은 일기를 채우려 한다. ‘뉴욕 첼시 기획 전시’, ‘국제 누드 드로잉전’을 비롯해 2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자 목우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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