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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우리나라 최초 군함 입항 120주년과 국제인 3대

2023-02-01 2023년 2월호

우리나라 최초 군함 입항

120주년과 국제인 3대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 초중반 신포동 외환은행 옆 ‘난다방’엔 풍채가 좋은 어르신이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퍼머넌트 웨이브를 한 것 같은 멋진 헤어스타일, 햇살처럼 화사한 웃음의 주인공은 인천 최초의 외과의사인 한옹 신태범(1912~2001) 박사였다. 의사이면서도 인문학적 교양이 상당히 높았던 신 박사는 기자들이 궁금한 인천의 역사, 문화, 현상에 대해 호탕한 웃음과 함께 명쾌한 답을 내주곤 했다. 다방을 드나들면서 그의 부친이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군함의 함장이자 선장 신순성(1878~1944)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신순성 함장이 탄 우리나라 최초 근대 군함이 인천항에 닻을 내린 때는 1903년 4월 15일이다. 고종은 3,000여 톤에 달하는 조선 최초 군함의 이름을 양무호揚武號라 명명한다.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이다. 조선 국방 예산 30%의 거금으로 구입한 양무호는 그러나 군함이라기보다 노후한 화물선에 가까웠다. 1888년 영국 딕슨사가 건조한 화물상선을 1894년 일본 미쓰이(三井) 물산이 사들여 일본-홍콩 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던 배였던 것이다. 일본은 이 배에 구식 함포 4문 정도만 달아 군함이라고 팔아먹었는데, 배가 워낙 낡은 데다 운항 기술도 전수해 주지 않아 신순성 함장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양무호에 대한 비판 속에 조선 조정은 일본에 새로운 군함을 주문, 1904년 12월 20일 1,056톤 급 광제호光濟號를 인도받는다. 광제호는 3인치 포 3문을 장착해 해안 경비와 등대 순시, 세관 감시 등 다목적으로 운용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통신도 바로 이 광제호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광제호 운영권 또한 우리 것이 아니었다. 일제가 선장과 기관장을 일본인으로 추천하고 신순성 함장을 1등 항해사로 강등시킨 것이다. 동경상선학교에서 근대식 기선 교육을 받고 광제호 인수 전 해군 장교로 임관된 그는 낙담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광제호는 관세국 소속 세관 감시선 처지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일제의 강제 한일병합 전까지 광제호는 태극기를 내리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되기 전날 밤, 신 함장은 결국 광제호의 태극기를 거두었고 지금까지 신 씨 집안이 보관 중이다.
신순성 함장은 장남 신태범 박사에게 “나는 일본인한테 직위와 배까지 빼앗기며 일했지만 너는 일본인 아래서 일하지 말고 독립적인 의사를 해라”라고 말한다. 문필가나 외교관이 꿈이었던 신태범 박사는 결국 경성제대 의학부를 나와 의사의 길을 걷는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조계지인 중앙동(신포동)에서 ‘신외과’를 개업한 신태범 박사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채 독야청청 ‘조선인 의사’로 인술을 펼친다. 광복 후엔 <인천 한 세기>, <반사경>, <먹는 재미 사는 재미>
같은 인천의 살아 숨 쉬는 역사 문화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신 박사의 장남 신용석은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을 지내며 <직지심경> 특종 등 기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인천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을 지냈다. ‘신순성-신태범-신용석’으로 이어지는 ‘국제인 3대’의 흔적은 지금 신포동 ‘떼아뜨르 다락’에 마련한 ‘한옹사랑방’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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