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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더 인천 : 일상 ② 인천의 목욕탕

2023-02-02 2023년 2월호


  인천 목욕탕


‘더(The) 인천’을 더(More) 알아가다. 지금 발 딛고 선 도시, 살아가는 동네, 그 안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인천 곳곳에 깃든 인천 사람 저마다의 삶과 기억, 숨은 이야기를 찾아 기록한다. 이번 호에는 동네 목욕탕을 찾았다. 수증기 자욱한 따뜻한 탕 안에 몸을 담그고 복잡한 세상사는 잠시 잊는다. 뜨끈뜨끈 몸이 데워지고 마음의 온도가 올라간다. 이 순간만큼은 그냥 참 좋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전재천 포토 디렉터

※ 내밀한 공간에 사진기와 녹음기를 들이밀어도,

더구나 코로나19 여파와 공공요금 인상으로 힘든 시기인데도 따듯이 맞아주신 목욕업 종사 시민들께 감사드립니다.


계양구 임학동 ‘훼밀리사우나’에서의 망중한

모락모락, 굴뚝에서 피어난 역사
‘다 ‘때’가 있다.’ 목욕탕 사진집이 있다. 작가는 지금은 사라진 부산의 한 목욕탕을 3년간 기록했다. 탕을 드나드는 사람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이태리타월’ 하나로 삶을 부단히도 살아내는 사람들을 벌거숭이로 담았다. 탕 안의 ‘살맛 나는 온도’와 ‘몸에 감기는 물의 촉감’을 남기었다. 이게 가능한가. 가능했다.
섣달그믐이 다가온다. 이맘때면, 뜨끈뜨끈 목욕탕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삶의 이야기를 담고만 싶어졌다. (사)한국목욕업중앙회 인천광역시지회(이하 협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인천의 목욕장은 209개소다. 최근 10년간 절반 정도가 사라졌다. 온기를 잃었다. 쌓이고 쌓여온 삶의 내밀한 표피가 벗겨지는 것이 안타까워, 동네 목욕탕의 따스함이 느긋이 온전히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지난해 가을 문 닫은 ‘제일사우나’ 남탕

‘이태리타월’ 하나로, 삶을 살아내는 세신사들. ‘훼밀리사우나’


‘때’마다 ‘때’ 미는 것이 당연해 역사랄 것이 무엇인가도 싶겠지만, 대중목욕 문화에도 그 시작은 있다. 힘으로 밀어붙인 개항, 쏟아지는 신문물, 그중에는 목욕탕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조용하던 바닷가 마을에 자리잡으면서 탕옥湯屋, 욕장浴場, 욕탕浴湯, 목욕간沐浴間이라 불리는 세상에 없던 공간이 생겨났다. 한여름에도 갓 쓰고 도포 입던 선비들에게 벌거벗은 채로 다른 사람과 섞이는 일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하나 개항은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1920년대 추정, 동구 화수동에 조선인 공설 욕장이 생겨났다. 광복 이후에 일본인 전용 탕은 조선인의 차지가 됐다. 산업화 시대를 거쳐 동네마다 ‘탕’이 생기고, 그러다 한증막을 갖춘 사우나가 들어서고, 먹고 놀고 자고 덤으로 씻는 찜질방이 생겨났다. 그렇게 욕탕의 온기가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1923년 문 연 월미도 조탕의 대욕실 풍경(인천시립박물관)


중구 신흥동, 굴뚝만 남은 ‘처녀목욕탕’.
1940년대, 지역에서 ‘처음’ 문 열어 이름이 ‘처녀’다.



수증기처럼 사라진 날들
2022년 10월, 달력이 마지막으로 가리키는 날짜다. 그날 이후, 중구 관동의 ‘제일사우나’ 남탕 안의 시간은 멈추었다. 냉탕도, 온탕도, 열탕도 차디차다. 그리운 온기, 수증기처럼 사라져버린 날들. 뜨거운 물을 주의하라고 열탕 벽에 새긴 ‘빨간 손바닥’ 마크가 낯설게 시선을 붙잡는다.
욕탕도 탈의실도, 목욕탕 한편의 구둣방도 이발소도 텅 비었다. 1970년대 한창때는 먹고 자는 직원만 20여 명이었다. 주인보다 돈을 더 버는 세신사도, 평생 몸을 굽힌 끝에 목욕탕을 차린 구두닦이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 떠났다. 나무를 태워 뿜어내던 후끈한 열기, 향긋한 비누 거품 냄새, 공중에 흩어지던 가위질 소리…. 쉬이 지워지지 않을 삶의 기억만 텅 빈 공간에 머문다.


지난해 가을 문 닫은 ‘제일사우나’ 남탕


​ ‘관동 2가 8번지’, 아버지의 자리


‘관동 2가 8번지.’ 아버지의 자리다. 제일사우나 김근동(77) 대표의 아버지이자 창립자인 고故 김수조 씨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왔다. 벚꽃 잎이 눈처럼 휘날리던 새하얀 세상, 뜨겁게 몸을 감싸던 욕탕 물의 감촉을 잊을 수 없었다. 30대에 고향 대구에서 섬유 사업가로 성공한 그는 인천으로 올라와, 그때 그 목욕탕 건물을 사들여 새로 지었다.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가진 모든 걸 쏟아부었다. 1965년 목욕탕 문을 열 당시, 3층 건물에 건평 892m2(270평)로 이 일대에서 규모가 제일 컸다. 그 엄청난 돈이 어디서 났느냐며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아직 온기가 남은 ‘제일사우나’ 여탕에서


 ‘제일사우나’ 남탕의 냉기 가득한 열탕


아버지와의 약속, 지켜낸 시간
자그마치 58년이다. 그 긴 세월 이 동네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때론 고단했지만 행복했다. 함께 나이 들어갔다.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더 짧아져만 간다.
“돈을 못 벌어도, 적자가 나도, 나 죽을 때까지는 절대 문 닫지 마라. 목욕탕 해서 오 남매 다 학교 보내고 출가시켰다. 이제야 문 닫는 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목욕탕을 끝까지 지키라고,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한 10년은 돈벌이가 안 됐다. 좀 나아질까, 리모델링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속으로 ‘영감 웃긴다’라고 했어.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돌아가시고 장례 치른 다음 날, 바로 문 닫고 끝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6년 더 목욕탕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 죽을 때까지 해야, 진짜로 지키는 거지….” 버티고 버텨오다, 이제 정말 끝이 났다. 이번 설이 지나면 여탕도 곧 문을 닫는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마저 멈춘다.


동구 인천송현초등학교 앞, 51세 된 ‘세계목욕탕’

수요일에 동네 목욕탕
아차, 매주 수요일은 쉬는 날이다. ‘773-1013’, 간판에 적힌 번호를 눌러도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기계음만 반복적으로 들려온다. 옆집 세탁소에 가서 도움을 청하자 선뜻 나서준다. 지나가던 한 할머니는 목욕탕 주인 만나러 왔느냐며 전화기를 꺼내 든다. 오래된 동네 목욕탕이 맞다.
“어이, 목욕탕~! 거 있어?” 고요한 골목을 흔들어 깨우는 세탁소 아저씨의 외침에 ‘세계목욕탕’ 2층 창문이 드르륵 열린다. 유리문엔 수증기가 뽀얗게 서려 있다. 주인 홍경숙(67) 씨가 얼굴을 내민다. 설 이후에 오겠노라, 약속한 날짜보다 이르게 찾아간 터였다. 얼굴엔 반가움보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닫힌 문을 활짝 열어준다.



 ‘남성 출입 금지’, 시대의 흐름 속에 여탕만 남은 ‘세계목욕탕’


어떤 날에도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는 ‘세계목욕탕’ 홍경숙 대표



여자들만의 ‘세계’
동구 송현동에 있는 세계목욕탕은 반백 년을 살았다. 1972년에 태어나 시아버지 고故 김상문 씨에 이어 김수남(68), 홍경숙 부부가 2대째 돌보고 있다. 고인의 뜻을 받아 대단한 사명감으로 가업을 물려받은 건 아니다. 21년 전, 중년의 부부는 1남 1녀 끝까지 건사하며 먹고살아야 했다.
‘남성 출입 금지.’ 입구에 쓰인 문구에 걸음을 되돌리는 사람이 반이다. 세계목욕탕은 여성 전용이다. 처음엔 남탕도 있었다. 가까이 화수부두에서 몰고 온 비릿한 바다 냄새를 닦아내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한창 때엔 하루 손님 200명은 거뜬했다. 지금은 주말엔 50여 명, 평일에는 30명이 될까 말까다. 24시 사우나가 하나둘 생길 때마다 발길이 끊겼다. 근처에 낮은 집들이 헐리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동네 집이 낮아야 목욕탕 장사가 잘된다. 요즘 새로 짓는 집들은 하늘 높이 솟아 올라만 간다. 그 옆 목욕탕엔 그늘이 진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있지요?”라고 물으니, 주인장이 머뭇머뭇하다 끝내 답하지 못한다. “좋은 기억이라….” 잘 생각나지 않는다. 전기 요금, 수도 요금, 가스비가 올랐다. 하는 수 없이 올해부터 목욕 요금을 천 원을 올려 7,000원 받는다. 손님들이 서운해한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나이 든 단골들은 목욕탕이 그대로여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저죽을 때까지는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한결같이 찾아주는 손님들이 식구나 다름없어요. 힘든 일은 위로하고, 좋은 일 생기면 같이 기뻐하고.” 가족 같은 그들을 위해, 부부는 오늘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뜨끈한 목욕물을 욕탕 가득히 받는다.


‘아~ 좋다. 시원하다.’ ‘훼밀리사우나’

​ 다 ‘때’는 있다. ‘훼밀리사우나’ 남탕


결코 사라지지 않을
계양구 임학동 도시 한복판, ‘훼밀리사우나’라고 큼지막이 쓴 간판이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온다. 높다란 굴뚝도, 붉은 온탕 표식도, 빙글빙글 삼색 등도 없다. 12년 전 이후남(59) 대표가 인수해 새로 개업할 당시, 이 일대엔 한 집 걸러 한 집꼴로 24시 찜질방과 사우나가 있었다. 그땐 규모나 시설 면에서 ‘핫’했지만 이젠 제법 세월이 묻어난다. 그래서 더 편안하다. 장인이 전통 방식으로 제대로 지었다는 불한증막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 대표는 “한증막에서 몸을 데우면 뜨끈한 구들방에서 하룻밤 잔 것처럼 몸이 개운하다는 손님이 많다”며 그 맛에 산다고 웃는다.


 ‘훼밀리사우나’ 김광식 이발사와 오랜 단골손님


​‘훼밀리사우나’ 단골 김승호 씨의 여유로운 한때



동네 목욕탕에 비하면 신식이지만 사람들은 지긋이 나이 들었다. 김광식(70) 이발사는 20여 년 한자리를 지켰다. 목욕하는 김에 이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발하기 위해 그를 찾는 손님도 많다. ‘사각사각’ 가위질을 따라 머리칼 잘려나가는 소리가 정겹다. 거울 위로 훤한 얼굴이 비친다. 10년 단골은 역시나 오늘도 머리가 마음에 든다. “딱 내 스타일, 익숙하고 편해요. 미용실은 절대 못 따라가죠.”
손님 이준행(75), 김옥분(66), 김복순(63) 씨도 이 집과 10년 인연이다. “우리 나이면 날 춥고 몸 아플 때, 한증막에서 땀 빼고 뜨거운 탕에 푹 몸 담그는 게 최고야.” 왕언니 말에 아우들이 “이 언니는 집 버리고 하룻밤 자고 갈 때도 많다.”라며 장난을 건다. 최진원(24), 이지원(23) 씨 커플은 찜질방 데이트가 처음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따뜻한 한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잖아요. 목욕업 종사자들에겐 더 힘든 시간이지만 버티고 이겨내어 끝까지 남아주길 바랍니다.” 협회 김효숙(64) 사무국장과 나도 같은 바람이다.
사랑하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가슴에 더 선명하게 박히는 일이다. 문 닫아도 후회는 없지만 단골들이 걱정이라는 사장님. 52년생 일흔하나 나이에 다시 일할 목욕탕을 찾아야만 하는 세신사. 마지막 날까지 예약을 잡은 새벽반 단골 ‘뽀야’ 아주머니. 아직, 안녕을 고할 준비가 안 됐다.



첫 찜질방 데이트의 순간, 최진원·이지원 커플

​뜨끈뜨끈 ‘훼밀리사우나’ 불한증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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