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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칼럼

2023-03-02 2023년 3월호

팔미도등대 ‘120년 불빛’과의 대화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두 개의 섬이 마치 ‘八’ 자 모양으로 뻗어 내린 꼬리처럼 보여 이름 붙여진 팔미도. 연안부두에서 유람선 타고 50분이면 도착하는 13.5km의 거리. 한 시간 정도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 팔미도는 아담하다.
팔미도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섬이었다. 다만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지도 ‘청구도’엔 팔미八未로, ‘대동여지도’엔 팔산八山으로 표시돼 있다. 낙조를 받으며 돌아오는 배의 모습이 아름다워 팔미귀선八尾歸船이라고 불리며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히던 명승지였다.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섬에 등대가 들어선 때는 1903년이다.
개항기 우리나라를 넘보던 서구 열강들은 이양선을 앞세워 인천으로 밀려든다. 새로운 침탈지로 정치·경제적 거점을 삼는데 개항장 인천만큼 적당한 곳도 없었다. 팔미도는 인천으로 가는 바닷길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했고,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섬이었다.
가장 먼저 마수를 뻗친 나라는 일본이다. 개항하던 해 일본은 조선 조정과 체결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에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는 규정을 명시한 터였다. 조선이 저물어가던 1901년, 일본은 규정을 들어 등대 건설을 촉구한다. 일본의 등쌀을 견디지 못한 조선 조정은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 등대와 백암 등표 건설을 시작해 1903년 6월 완공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그렇게 불을 밝혔다.
47년 뒤인 1950년 9월, 팔미도에 특명이 떨어진다. “9월 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혀라.” 비밀리에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도쿄(東京) 유엔군 총사령부가 팔미도에 들어가 있던 한국 부대 ‘켈로(Korea Liaison Office, KLO)’에 등대 점화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점등이었다.
영흥도를 중심으로 첩보 활동을 벌인 켈로 부대원들은 비밀리에 팔미도에 잠입해 그 시각 등대에 불을 밝혔고, 이튿날 새벽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10만 병력과 대함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한다. 이를 계기로 북한군에 밀리던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고, 13일 만에 서울 중앙청엔 태극기가 휘날린다.
팔미도등대는 시설이 낡아지면서 건립 100주년이던 2003년 운영을 중단한다. 같은 시기 그 옆에 자동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새로운 등대가 들어섰다. 새로운 등대는 최대 50km까지 바닷길을 밝혀주고 위성항법 보정 시스템으로 날씨와 연안 해상을 관측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팔미도등대 120주년 기념일인 오는 6월 1일 팔미도등대의 불이 다시 켜진다.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이날 등대에 불을 밝히는 이벤트와 함께 초등학생들을 초청, 일일 등대장 프로그램과 등대 사진 전시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일제강점기의 수난, 한국전쟁 등 풍파를 겪으며 인천, 대한민국의 안녕을 지켜낸 팔미도등대. 올봄엔 이 등대를 찾아 ‘120년의 대화’를 나누어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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