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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 - 칼럼

2023-05-01 2023년 5월호


개항 140년, ‘제물포 르네상스’ 꽃피우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허정인 포토그래퍼


한적한 어촌이던 제물포(인천항)로 세계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는 1883년 즈음해서다. ‘개항’과 동시에 인천은 ‘조선-세계’를 잇는 교류의 거점으로 급부상한다. 서구 열강은 제물포에 앞다퉈 영사관을 설치했고, 자신들이 잡은 터에 울타리를 쳤다. 인천해관, 인천감리서 같은 행정기관과 함께 상공업시설, 종교·교육·문화시설이 여기저기 들어섰다. 140년 전, 인천은 이미 ‘세계적 글로벌 허브 도시’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그런 인천에서 우리나라 최초, 최고最古의 역사가 시작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경인선, 팔미도등대, 대불호텔, 기상대 같은 시설부터 종교, 음악, 스포츠, 짜장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신문물이 인천을 통해 처음 들어와 서울로 전해졌다.
새로운 문물의 급속한 유입과 함께 조선 시대 이래 이어져 온 해양을 통한 대외무역 중심지도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했다. 인천~서울 간 화물 수송이 활발해지며 바닷길 중심이던 화물 운송로의 상당 부분이 육로로 바뀌기도 했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발원지이자 산업화의 성지인 인천. 그 중심엔 언제나 인천항이 있었다. 인천항 갑문 축조(1918), 1960년대 경제개발5개년계획 추진, 인천내항 도크 확장(1966~1975), 경인고속도로 건설(1968), 연안부두 축조(1973) 등을 통해 물류가 원활해지면서 인천이 우리나라 경제에 담당한 역할은 적지 않았다. 전국 8도 사람들이 너도나도 인천으로 모여든 것은 “인천에 가면 먹고살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은 그렇게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해불양수海不讓水의 도시로 문호를 열어 주었다.
개항 이후 1거점(인천내항) 2축(경인전철, 경인고속도로)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인천은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인천항의 물동량은 점차 줄어들었고, 1970~1980년대 인천의 중심지였던 동인천역 주변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며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으로 남게 됐다. 직할시(1981), 광역시(1995) 시대를 거치며 인구 300만의 대도시로 성장했음에도 그에 걸맞은 인프라나 환경 조건은 조성되지 않은 탓이었다. 오히려 인천 외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이 사용하는 화력발전소, LNG인수기지, 수도권매립지 같은 혐오시설까지 떠안으면서 인천시민 삶의 질은 점점 더 열악해져 온 게 사실이다. 민선 8기가 ‘제물포 르네상스’를 중요 목표로 정한 것은 옛 영화를 되찾고 시민이 행복한 세계 초일류도시를 만들기 위함이다.
이 사업은 인천항을 중심으로 중·동구 원도심을 활성화해 다시금 우리나라 최고 거점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프로젝트다. ‘시민이 행복한 세계 초일류 글로벌 허브 도시’를 위한 첫걸음인 것이다. 인천시는 이를 위해 민선 8기 유정복 시장이 문화예술 축제 형식의 취임식을 한 8부두 내 ‘상상플랫폼’을 오는 6월 시민들에게 개방한다. 민선 8기 취임 1주년 기념식과 새해맞이 행사도 계획 중이다. 인천내항을 시민들이 북적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인천내항 배후 도시이면서 가장 번화했던 ‘동인천역 2030 역전 프로젝트’도 추진한다. 동인천 북광장과 남광장을 새롭게 꾸며 다시금 사람들의 아카시아 꽃같은 웃음이 넘쳐나는 거리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개항 140주년, 인천이 ‘제물포 르네상스’로 꽃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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