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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의 아침-우리나라 최초 축구 도시 인천

2023-06-01 2023년 6월호

인천유나이티드 창단 20주년

글·사진 김진국 본지 편집장


인천시립박물관 기획특별전 ‘다시, 비상: 인천유나이티드FC 2003-2023’.


인천에서 프로축구단 창단 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시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직후다. 월드컵 역대 최고 전적인 4강 열기를 타고 인천시민 구단을 창단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시민주를 구입하면서 레플리카를 선물 받았다. 푸른 바탕에 검은 줄이 쳐진 유니폼을 입고, 마치 국가대표라도 된 양 들떠 새벽마다 동네 공원에서 축구공을 찼던 기억이 새롭다. 동네에서 함께 공을 차던 친구들은 부평고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의 축구 사랑은 거의 남미 축구 팬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일 월드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남일, 이천수 같은 선수가 부평고 출신이고 앞서 노정윤, 이임생, 이근호, 김봉길 선수 등 부평고에선 ‘축구 빅 스타’를 많이 배출한 터였다.
인천에선 2003년 우리나라 열세 번째 프로축구단이 탄생한다. 이름하여 ‘인천유나이티드FC’. 인천시민들이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 만든 축구단이었다. 2004년 K리그에 입성한 인천유나이티드는 2005년 K리그 준우승까지 올랐지만 이후 줄곧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단 한차례도 2부 리그로 강등되지 않고 꿋꿋하게 1부 리그에 살아남았다. 오죽하면 ‘생존왕’, ‘잔류왕’이란 별칭까지 얻었을까. 저력의 근저에 ‘우리나라 최초’란 역사가 살아 숨 쉰다.
인천은 우리나라에 축구가 처음 시작된 곳이자 최초의 유소년 팀이 탄생한 곳이다. 개항 한 해 전인 1882년 한반도 해역을 측량하던 영국 배 플라잉 피쉬The Flying Fish호가 제물포(인천항)에 정박한다. 오랜 선상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던 영국 선원들은 해변에서 축구로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나 관가의 허가 없이 상륙하는 바람에 조선 관졸들에게 쫓겨났고, 이때 두고 간 공을 주워 아이들이 놀았는데 이것이 근대식 축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1901년 강화도 축구팀에 대한 기록도 있다. 1901년 3월 발간한 영국 잡지 <모닝캄The Morning Calm> 89호는 “성공회 강화학당 축구단은 브라이들 신부님에게서 몇 년째 정성스럽게 훈련을 받고 있다. 소년들은 매우 좋은 기술을 갖고 있는데, 조금 더 훈련받는다면 영국 리그에서 몇 게임 뛰기에도 충분할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921년 한용단 등 6개 팀이 모여 ‘제1회 전인천축구대회’를 개최한 이래 일제강점기 대회를 거쳐간 인천팀은 30개가 넘었다. 광복 전후 전국 최강이던 ‘조일양조’ 축구단도 인천 연고 팀이었다. 연고 개념이 없던 실업 축구 시절에도 인천엔 ‘학원 축구’가 존재했다. 창영·축현·부평동 초등학교와 부평동중·부평고·운봉공고, 인천대 축구부는 인천시민을 하나로 묶고 열광시키는 촉매제였다.
1983년 프로축구 시대가 열리며 인천 연고 유공 축구단이 생겼지만 서울로 떠나면서 인천시민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아직 식지 않은 월드컵 열기를 타고 인천유나이티드가 탄생한 것이다.
창단 20주년을 맞은 인천유나이티드는 올해 처음으로 ACL(아시안챔피언스리그)이라는 아시아 무대로 진출한다. 첫 국제 무대 데뷔인 만큼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 믿지만 라인업line-up만으로도 큰 성과라 하겠다.
인천은 최근 ‘재외동포청 유치 성공’과 함께 ‘1,000만 시민이 행복한 세계 초일류 글로벌 허브도시’로 비상하는 중이다. 인천유나이티드가 인천의 꿈 대한민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나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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