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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골목길 TMI ⑫ 구읍뱃터 물길 따라 역사 산책

2023-06-01 2023년 6월호


우리나라의 인후咽喉에 위치한 인천은 예로부터 해상방위의 요충지였다. 수도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침략자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인천은 온몸으로 적들을 막아내고 쫓아냈다. 지정학적 운명이었다. 적들이 인천 내륙에 도달하기 위해선 중간 기착지인 섬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 자연도(영종도) 역시 그중 하나였다. 멀게는 고려시대부터 가깝게는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영종도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섬’이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 사랑의 향기가 만발하는 영종도를 걸었다.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그래퍼
참고 <인천광역시사>, <인천 이야기 전집 3. 인천의 독립운동>


1919년 3월 28일, 외딴 섬마을 용유도에서 태극기가 파도처럼 물결쳤다.
총도 칼도 없는 우리에게는 태극기가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민족을 살린 그날의 태극기

호국의 섬, 태극기 펄럭이다
구읍뱃터 근처 영종진공원엔 영종진 성곽과 태평루가 재현돼 있다. 1653년, 조선 효종 때 강화수로 방어를 위해 경기도 남양부에 있던 영종진을 옮겨왔는데 현재의 구읍뱃터 일대가 그 자리였다. 고종 12년(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양호의 포격으로 파괴될 때까지 영종도는 약 220년 간 왜구들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다.
운양호 사건은 일본이 통상요구를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도발이었다. 왜군은 강화도에 상륙하려했지만 조선군이 초지진에서 포를 쏘며 반격하자 뱃머리를 영종도로 돌려 섬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영종진 수병 35명이 전사하고, 대포 36문과 화승총 130여 정 등 막대한 무기를 강탈해갔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잡아가 승전 축하 잔치도 벌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배상과 수교를 강요한다. 결국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문호를 강제 개방시켰다.
바닷길로 쳐들어온 외세에 맞서 싸운 영종도의 기상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진다. 1919년 3월 28일 용유도에선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유학하던 조명원이 들불처럼 번지는 만세 운동 소식을 섬으로 가져왔고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과 함께 ‘혈성단’이라는 비밀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용유도 주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죽창에 매달아 관청리 광장에 꽂았다. 총도 칼도 없는 우리에게는 태극기가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종이에 그린 태극기, 이불보에 그린 태극기, 치맛자락에 그린 태극기… 거리마다 태극기가 물결쳤다. 이날 시작된 만세 운동은 이후 이틀동안 계속됐다. 영종역사관에는 독립운동가 이난의 선생이 당시 사용한 태극기가 전시돼 있다. 태극기 우측에는 한자로 ‘대한 독립 만세’란 글씨가 쓰여있다. 상황이 긴박했는지 좌우 괘의 위치가 바뀐 모습에 가슴이 저릿하고 시리다. 104년 전의 피맺힌 함성이 아득하게 들리는 듯 하다.
영종역사관 중구 구읍로 63 032-760-6307
구읍뱃터 중구 중산동 1948-3



 2016년 재현된 영종진 성곽. 본디 구읍뱃터 자리에서 한반도를 수호했다.



영종진전몰영령추모비. 운양호 사건에서 순직한 조선 수비병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어민들과 견뎌낸 유배, 봄날은 온다
구읍뱃터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예단포’. 10여 개 횟집이 바다를 향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아담한 포구다. 예단포 앞에는 신도, 시도, 모도 삼 형제 섬이 공깃돌처럼 던져져 있다. 오른쪽으론 인천 서구의 유일한 섬 세어도가 보이고, 바다 건너 솟아 있는 마니산의 모습도 어렴풋이 들어온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가 나이 서른여섯(1916년)에 1년 동안 이곳에 갇혀 지냈다. 죄목은 조선인들이 중국 연길에 설립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역사 교과서 <최신동국사>를 편찬하고, 배일 기관 잡지 <대진>에 ‘안중근 전설’을 기고했다는 것. 그는 체포될 때 가슴에 <안중근전> 초고를 품고 있었다.
추운 겨울(1916년 12월) 배를 타고 섬에 들어온 그를 예단포 주민들은 따스히 품어주었다. 그는 자서전 <꿈속의 꿈>에서 당시 1년 치 밥값 53원을 예단포 주민들이 분담하고, 교육을 청하는 등 그를 도왔다고 회상했다.
‘일 년이 꿈 같이 지났으니 / 내가 곧 꿈속의 사람이로다 / 꿈을 깨어 배를 타고 가니 / 앞길에 온갖 일이 봄이로다.’ 독립투사 계봉우 선생은 이듬해 겨울 영종도를 떠나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조국의 봄날’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란 그의 굳건한 믿음이 애달프게 다가온다. 그가 일평생 바쳐 애타게 기다린 조국의 봄날은 별세 후 10년 뒤 실현됐다.
예단포선착장 중구 예단포1로 2-10

바다와 섬이 그려내는 경이, 예단포 둘레길
예단포는 한때 번창했던 어촌 마을이다. 조기 파시가 이곳에 섰고, 각종 어선이 기항하면서 사람과 돈이 늘 넘쳐났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200여 가구가 어업으로 풍족하게 생활해 “쌀밥을 먹으려면 예단포로 시집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조기잡이가 쇠락하고, 어선들이 인천 화수부두로 정박지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쇠퇴했다. 지금은 주변이 영종도 미단시티 사업 부지에 편입돼 번성했던 옛 모습은 대부분 사라졌다.
하나 상전벽해의 바람도 아름다운 자연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포구 옆 해안을 따라 둘레길이 만들어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선착장 옆, 나무 계단 길에 오르면 싱그러운 ‘예단포 둘레길’이 열린다. 숲 한가운데를 기분 좋게 걷다 보면 뻥 뚫린 바다를 끼고 도는 아기자기한 길이 펼쳐진다. 경이로운 풍경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언덕 위 정자에 오르면 드넓은 바다가 앞마당처럼 펼쳐진다. 강화도와 신도 등 주변 섬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다가온다. 기분 좋은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너무 시원하다. 다음에 부모님도 모시고 오자.” 정자에 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예단포와 마니산 바다 위로 노을이 잠잠히 스민다. 오랜 세월 외세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낸 그 물길은 오늘 평화롭기 그지없다.


저녁 노을이 잠잠히 스며든 예단포 둘레길

섬과 바다가 그려낸 장엄한 풍경

구읍뱃터에서 10km쯤 떨어진 예단포.
“쌀밥을 먹으려면 예단포로 시집가라”는 말을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어촌 마을이다.


1,000만 국제도시, 평화도로 첫걸음
내친김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달려본다. 영종도에서 삼목도, 용유도… 바다가 메워지며 파묻힌 섬의 옛 모습을 가늠해 본다. 창밖으로 새 땅 위에 화려하게 솟아난 공항신도시가 스쳐지나간다.
1990년대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위한 사상 최대 규모의 해안 매립으로 영종도, 용유도 두 섬이 하나가 되며 행정구역상 영종도 전체 면적은 약 110km2를 넘었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섬이다.
오늘 1,000만 국제도시로 발돋움한 인천, 대한민국의 관문 영종국제도시는 평화도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영종도 북쪽 바다에서는 섬(중구 운서동)과 신도(북도면 신도리)를 잇는 평화도로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총연장 3.26km의 왕복 2차선 도로로 오는 2025년 말 완공될 예정이다. 자전거 도로를 겸한 보행로도 만들어 자동차 없이도 두 섬을 오갈 수 있게 된다.
영종~신도 구간은 서해남북평화도로 건설 사업의 1단계다. 영종에서 신도, 강화도, 교동도를 거쳐 북한 해주와 개성까지 연결하는 첫 단추다. 우리 시는 영종도와 강화도 남단 등에 세계적 기업과 국제기구를 유치해 인천을 세계 초일류도시로 만드는 ‘뉴홍콩시티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정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과 분단의 바다에 평화의 기운이 움튼다. 응원이라도 하듯 비행기들이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세계의 하늘로 비상한다.


서해남북평화도로 건설 사업의 1단계, 영종~신도 구간. 2025년 완공 예정이다.


세계평화의 숲을 달리는 시민


사진 한 컷,
인천의 기억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 ‘자줏빛 제비섬’이란 뜻이다. 제비 날던 그 섬에 이제는 비행기들이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오른다. 영종도는 원래 네 개의 섬(영종도, 용유도, 삼목도, 신불도)이었다. 1992년부터 인천국제공항과 신도시 건설을 위한 매립이 이뤄져 지금처럼 큰 몸이 되었다. 섬의 운명도 바뀌었다. 도시가 솟아나고 사람이 모여들었다. 2000년 영종대교, 2009년 인천대교가 놓이며 하늘길과 바닷길, 땅길이 모두 열린 국제도시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작고 한적했던 인천의 섬마을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사진 인천도시경관아카이브, 김홍일 사진사


1
공항이 생기고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구읍뱃터는 섬사람들이 인천을 오가는 나들목이었다. 물건을 나르고, 매일 아침 뭍으로 등교하는 학생들로 작은 뱃터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1980년대까지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풍어제를 지내기도 했다. 사진은 영종도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던 김홍일 씨가 찍은 그 시절 풍경이다.


2
2001년 3월,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며 인천에 대한민국의 새 하늘길이 열렸다. 취항 항공사 88개, 취항 도시 189곳, 취항 국가 58개국, 2019년 기준 연간 이용객 7,100만 명. 오늘날 국제공항은 국제 여객 기준 세계 5위로 성장했다. 인천은 전 세계의 발길이 들고나는 국제도시로 발돋움했다.



3
우리 시가 낡은 행정구역을 개편해 중구 내륙과 영종도 중심의 영종구를 분리한다. 영종국제도시는 인천공항과 관련한 산업·기관이 몰려 있고 하늘도시, 공항신도시 등이 조성돼 10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상전벽해의 발전을 이뤄낸 영종도가 중구에서 영종구로 독립, 힘찬 비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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