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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땅 이름 이야기-부평富平·부평구富平區

2024-05-28 2024년 5월호

우리가 밟고 선 

이 땅 위의 이름들


글 최재용 연수문화재단 대표이사

다섯 번째 땅 이름

[부평·부평구]


인천의 ‘부평’이라는 이름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10년, 길주목吉州牧이 부평부富平府로 바뀜으로써 생겼다. 대개는 이 ‘부평’을 넓은 곡창지대여서 ‘수확이 많은<富> 들<平>’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 동네는 먼 옛날부터 일제日帝 강점기 초반까지도 곳곳에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던 곳이니, 풍요로운 평야였다고 볼 수는 없다.

1656년에 나온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등 여러 옛 자료들을 보면 이곳 부평에 대해 “삼면三面이 모두 물이며, 낮고 막혀 통하지 않는 땅”이라는 표현이나, 바닷물을 막기 위해 만든 방죽 이름이 여럿 나온다. 주요 산물産物도 소금·조기·낙지 등이 나올 뿐, 쌀이나 곡식은 적혀 있지 않다. 따라서 고려 충선왕 시대에 이곳이 풍요로운 농경지였다고 볼 수는 없으니, ‘부평’도 ‘풍요로운 들판’이라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부평이 상습 침수지를 벗어나 안정적으로 곡식을 생산하게 된 것은 1923년 쌀의 생산량을 늘리려는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부평수리조합’이 생기고, 이곳에 농사용 물을 대주는 ‘서부간선수로’가 생긴 뒤부터로 본다. 따라서 부평의 뜻은 언어학적 입장에서 따져봐야 할 것인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다음 내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부평군은 본래 고구려의 부여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김화현이다.(富平郡 本高句麗夫如郡 景德王改名 今金化縣)”

이를 보면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김화군金化郡의 신라시대 이름이 지금의 인천 부평과 똑같은 한자 이름이었다. 그리고 ‘富平郡’이 ‘金化縣’이 됐다고 했으니 ‘富平=金化’라는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이어 ‘富=金’이라는 관계도 추론할 수 있다. ‘富平’의 ‘平’은 벌판이나 동네 등의 뜻일 뿐이고, ‘金化’의 ‘化’는 별 뜻이 없는 접미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말 땅 이름에 쓰인 ‘金’ 중에는 ‘신神’이나 ‘거룩한 존재’를 뜻하는 우리 옛말 ‘ㄱㆍㅁ’을 한자로 바꿔 표현한 것이 많다. ‘金化’의 ‘金’도 이 같은 사례로 해석된다. 그리고 ‘富=金’이니 ‘富’ 역시 ‘金’과 같은 뜻을 가진다. 따라서 ‘富平’은 ‘신성한 땅(동네)’ 정도로 해석이 된다. 이는 부평의 옛 이름인 ‘주부토主夫吐’의 뜻과도 통하는 것이다. ‘(부족장이나 제사장처럼) 고귀한 인물이 다스리는, 중심이 되는 지역’이라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 옛날부터 인천과는 행정구역이 달랐던 부평이 인천에 들어온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과 1940년, 두 차례에 걸쳐 인천부仁川府가 부府에 속하는 땅을 넓힐 때였다.


김정호의 <청구도>에 나오는 부평과 그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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