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내가 사랑하는 인천-김중미 작가
나의 인천,
우리 가족의 인천
글 김중미 작가
2000년, 작가는 인천 동구 만석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펴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100일 만에 경기 북부에 있는 도시로 이사 가 그곳에서 살았다. 그 후 청소년 시기에 인천으로 다시 이사 와 계속 인천 시민으로 살고 있다. 인천 구도심에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스민 곳이 많다. 내가 태어난 곳은 중구 송학동3가 5번지다. 외가는 오랫동안 송학동에서 살았고 친가는 1·4후퇴 때 피란 와 그곳에 자리 잡았다. 송학동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조계 지역이었다. 해방 뒤 일본인이 돌아가고 빈집으로 남은 적산가옥이 한국인에게 불하되었지만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었다. 1·4후퇴 때 피란 온 친가와 일가친척들은 폭격 맞아 골조만 남은 이와이 병원과 그 근처 적산가옥에 들어가 살았다.
우리나라 최초 도선사인 유항렬 도선사에 이은 두 번째 도선사였던 외할아버지는 1·4후퇴 때 유항렬 도선사와 함께 인천항에 있던 배들을 피항시켰다. 그리고 유항렬 도선사가 부산으로 피란 가자 인천에 홀로 남아 날마다 인천항을 오갔다. 부산으로 피란 갔던 엄마가 인천 외할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것은 휴전 협상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연애를 시작했다. 6년간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이 결혼한 곳은 지금 크라운볼링센터 자리에 있던 낙원예식장이었다. 개항기 때 미국인 월터 타운센드가 한국 최초로 설립한 근대식 정미소 담손이방앗간이 해방 뒤 댄스홀(카바레)로 운영되다가 낙원예식장으로 잠깐 운영되기도 했다. 엄마, 아버지는 현악 3중주단이 웨딩마치를 연주하던 그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친가는 내가 초등학생 때 송학동에서 관동으로 이사를 했고 내내 그곳에서 살았다. 청소년기 중반까지 인천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살았지만, 명절이나 방학 때는 인천에 와서 지냈기 때문에 관동, 송학동, 항동, 신포동, 내동, 해안동 등 동인천 곳곳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배어 있다. 엄마 아버지는 신포동이나 내동, 싸리재를 함께 걸을 때마다 그 골목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 경인면옥, 중화루처럼 엄마 아버지가 연애할 때 다녔던 음식점이나 애관극장, 동방극장에 가면 두 분의 연애 시절을 추억했다.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딸들에게 엄마에게 들었던 엄마 아버지 연애 이야기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우리 부부 역시 개항장 부근과 동인천이 주요 데이트 코스였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3대에 걸쳐 이어온 인천 사람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나는 딸들을 키우며 물질적인 풍요 대신 그 이야기들을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의 힘으로 아이들이 살아가는 동안 거센 비바람이 불더라도 뿌리가 단단하면 쉽게 뽑히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2000년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출간하며 작가가 된 나는 한동안 함께 작업해 보자는 출판사의 권유를 여러 번 거절했다. 난생처음 쓴 소설로 작가라는 말을 듣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고, 앞으로 어떤 작품을 써야 할지 더 고민이 필요했다. 그러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쓸 때처럼 세상이 주목하지 않고 사람들이 불편해서 외면하는 주변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쇠락해 가고, 지워져 가는 인천 구도심의 풍경을 글로라도 남기고 싶었다. 더러 인천과 강화와 가까운 김포가 작품의 무대가 되긴 하지만 내 작품의 주요 무대는 인천이다.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의 풍경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
1955년 3월 연극 전문 극장으로 개관한 시민극장.
1960년대 인천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해오다
2001년 9월 문을 닫았다.(위)
‘애관극장 2관’이라는 희미한 글자가 붙어 있지만,
이 극장은 원래 1970년대 초 개관한 ‘오성극장’이었다.(아래)
나는 작품 속에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지도 모르는 인천을 묘사한다. 언젠가 작품 속에 꼭 넣고 싶은 공간이 있다. 바로 영화관이다.
영화를 좋아하던 우리 가족은 인천의 영화관에 얽힌 기억이 제법 많다. 엄마는 신포동에 갈 때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데이트할 때 갔던 표관(키네마극장) 이야기를 해주었다. 또 엄마 아버지가 데이트할 때 자주 갔던 동방극장, 키네마극장 그리고 애관극장에 얽힌 이야기도 자주 했다. 20대 때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 나는 인천이 문화가 낙후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투덜거리면 엄마가 말했다.
“예전에는 안 그랬어. 서울이 너무 커져서 그래. 인천에서 클래식 연주회나 유명 작가, 정치인의 강연도 많이 열렸어. 그리고 영화관은 인천이 더 빨리 생겼고, 공간에 비해 수도 많았어. 우리 때는 문화적으로 인천이 서울에 뒤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어. 지금은 서울에 모든 것이 너무 집중되어 있어. 그게 좋은 건 아니야. 인천은 인천대로 서울과 다른 역사랑 문화가 있는데 그게 묻혀서 그렇지. 안타까워.”
청소년 시절 문화극장, 미림극장, 애관극장에 가면 서울과 동시에 개봉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인천극장, 현대극장, 자유극장 등은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동시 상영 극장이라 가보지 못했지만, 중앙시장 안에 있던 오성극장은 처음 개관했을 때부터 삼촌들을 따라다녔다. 초등학생 때 이후 오성극장을 갈 기회가 없었는데 남편과 연애할 때 찰리 채플린 영화를 시리즈로 상영한다고 해서 오랜만에 가게 되었다. 오성극장에 들어가는 순간 뭉클했다. 초등학생 때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미림극장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은 지는 꽤 되었지만 가끔 기획전을 할 때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갔었다. 아이들에게 미림극장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면서 새로 지은 화려한 건물보다 낡고 허름해도 지난 시간과 이야기가 담긴 건물이 더 가치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딸들이 어렸을 때는 애관극장과 인형극장을 주로 갔는데, 딸들이 청소년 무렵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2001년 강화로 이사 온 뒤에는 아이들이 원하는 영화를 보려면 어쩔 수 없이 김포나 인천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가야 했지만, 될 수 있으면 애관극장이나 인형극장을 이용했다. 인형극장마저 문을 닫고, 딸들이 대학에 간 뒤에는 예전만큼 영화관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에 내가 살고 있는 강화에 작은 영화관이 생겼다. 우리 부부는 ‘강화작은영화관’ 덕에 다시 영화를 즐기게 되었다. 다만 단관이라서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없어 예술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영화공간주안’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강화작은영화관’에도 씨네브런치 시간이 생겨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볼 기회가 늘었다. 그러고 보니 인천은 ‘영화공간주안’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마을은 어느 날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있고, 생태 환경이 보존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마을은 사람들의 생태 환경이다. 공동의 기억과 이야기를 가진 마을에서 살아갈 때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외롭지 않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내게 인천은 조부모, 엄마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추억이 있는 곳이고, 내 아이를 키우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간 곳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 인천에서 이야기를 찾고 짓고 만들어 갈 것이다.
강화작은영화관의 내부 모습
영화공간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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