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국제평화도시 인천 -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오늘
역사의 그날, 오늘 ‘평화의 빛’으로
작전 암호명 ‘크로마이트Chromite’. 5,000분의 1 확률을 뚫어라! 1950년 9월 15일, 오직 단 하루만 가능했던 위대한 작전.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판도를 뒤집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었다.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오늘을 있게 했다.
질곡의 역사 한가운데서 파이고 덧대며 단단해진 땅, 격동의 시대를 묵묵히 지켜본 바다. ‘국제평화도시 인천’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리에, 오늘 자유와 평화의 빛을 채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ㅣ 사진 최준근 포토디렉터
오늘 평화로운 바다에 투영된, 역사의 빛과 그림자. 팔미도.
(ⓒ류창현)
역사의 그날, 오늘 ‘평화의 빛’으로
10초에 한 번, 어둠을 가로지르는 빛줄기. 그 빛을 위안 삼아 오늘도 팔미도의 밤이 깊어 간다.
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로 불을 켠 이래, 한 세기가 넘도록 대한민국 격동의 역사를 묵묵히 비추어 왔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하루 전날인 1950년 9월 14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과 비밀 조직 켈로KLO 부대 대원들은 팔미도 등대를 점령해 연합군이 월미도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밝혔다. 그 빛을 따라 대한민국이 평화로운 오늘에 이르렀다.
전쟁과 생활에 필요한 장비들을 들고 인천에 상륙 중인 해병대 보충부대.(ⓒ화도진도서관)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였던 월미도 바다는 오늘 평화롭다.
5,000분의 1 확률을 확신하다!
1950년 9월 15일, 역사를 바꾼 ‘그날’. 새벽빛이 밝아올 무렵, 연합군의 함대들이 월미도 바다 위로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이다.
목표는 단 하나,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것’.
1950년 6월 25일 온 세상이 잠든 새벽 4시경, 북한이 기습 남침해 왔다. 북한군은 무서운 기세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피로 물들였다. 한반도의 90%를 집어삼켰다. 국군과 연합군이 한반도 남쪽으로 더 이상 밀려가지 않도록 반드시 막아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중심을 되찾아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절체절명의 선택이었다. 5,000분의 1 확률일지라도 기필코 성공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상륙함이 위험천만한 협수로를 통과한 후 10m나 되는 조수간만의 차를 돌파해야 했다. 당시 미 극동군 해군 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Chales Turner Joy 제독을 비롯한 연합군 참모진들은 인천상륙작전을 극구 반대했다. 하나 맥아더는 불가능하기에 도전했고 가능하게 만들었다.
“최악의 조건이 최선의 기회이다. 적이 ‘설마’ 하는 인천이 최상의 상륙지다.”
마운트 매킨리호 함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국가기록원)
자유공원에 최근 설치한 맥아더 동상 새 부조물 앞에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념의 파도를 넘어 평화의 바다로. 열강의 군함이 지나던 물길 위로 유람선이 유유히 떠다닌다.
바닷가 놀이터에선 아이들의 햇살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이토록 평화롭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천항에 병력과 장비를 운반하는 전차상륙함.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NARA))
고요하던 서쪽 바닷가 마을은 순식간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불리했던 전황은 한순간에 새 국면을 맞이한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과 국군은 연일 승전보를 남기며, 13일 만에 서울을 되찾아 태극기를 드높이 걸었다.
아군은 그 여세를 몰아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38선 가까이 올라갔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전초기지인 인천은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고요하던 바닷가 마을 하늘에서 포탄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선혈과 비명이 낭자했다. 푸르고 아름답기만 한 자연과 대대손손 지켜온 삶의 터전,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불타 사라져 버렸다.
이후로도 남과 북은 크고 작은 전투를 반복하며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했다. 그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참극 끝에,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129일 만의 일이다.
국제평화도시 인천
오늘, ‘국제평화도시 인천’에 아픔을 딛고 희망으로 일어선 한반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고 ‘자유와 평화의 빛’을 세계에 비춘다.
우리 시는 지난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역대 최대 규모로 치르고, 올해 제74주년 기념행사는 국제 행사의 틀을 갖추어 대대적으로 연다.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을 넘어, 인천을 ‘평화와 화합을 위한 전 세계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킨다.
다가오는 제75주년 행사는 참전 8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프랑스 노르망디상륙작전 못지않은 국제 규모로 치를 계획이다. 1950년 9월 15일, 역사의 그날이 세계인이 함께하는 자유와 평화 수호의 날이 된다.
74년 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포화 속으로 뛰어든 젊은 용사는, 늙고 쇠약해진 지금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싸울 각오가 돼 있으리라.
군번조차 없이 온몸을 바쳐 처절한 전쟁을 치른 영웅들이 있었기에, 오늘 여기에 우리가 있다.
저 아름다운 바다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 치열한 전투의 장이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인천항을 포격하는 모습.(ⓒ화도진도서관)
1950년 9월 16일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이 인천 시내에 진입했을 때, 부모를 잃고 길가에 홀로 앉아 우는 어린 소녀.(ⓒRonald L. Hancock)
1950년 10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천을 수복한 연합군이 인천 시장과 시민에게 인천시 반환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화도진도서관)
오늘, 당시 인천시청이었던 중구청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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