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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길 위의 인문학 : 우현 고유섭

2025-03-08 2025년 3월호

암울했던 시기에 한국미술의 기초를 다진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글. 김성배 문화비평가



1992년 새얼문화재단에서는 제1회 새얼문화대상의 수상자로 우현 고유섭을 선정하고 동상을 건립했다. 조각 역시 인천 출신의 작가 고정수가 맡았다.


1974년 6월, 우현 30주기에 맞춰 건립된 우현 고유섭 추모비


“우리의 美術(미술)은 民藝的(민예적)인 것이매 信仰(신앙)과生活(생활)과 美術(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우현 고유섭(1905~1944) 추모비에 새겨진 글귀다. 우현은 우리 미술의 특색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 했다. 이는 기교와 계획이 생활과 분리·분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개성적·천재주의적·기교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생활 속 미술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민예적’이라 명명했으며, 우리 미술의 큰 줄기를 형성해왔다고 통찰했다. 우현은 1905년 중구 용동에서 태어나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경성제국대학 본과에 입학해 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이후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해 1944년 별세할 때까지, 고려 유물과 개성 고적(古跡), 신라 공예, 고구려 고분(古墳), 조선 탑파(塔婆)와 회화 등 한국미술 전반을 연구하며 150여 편의 논문과 기고문 등을 남겼다. 이 유고(遺稿)들은 2013년 10권으로 완간되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도 한국미술의 기초를 다졌기에 그 위에서 후학들이 이를 계승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한국 미술사를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나아가 미술을 넘어 우리 문화에 대한 자아와 자주의식이 무너지지 않도록, 이를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이런 우현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기리는 일에 학계는 물론이고 지역사회의 노력 또한 꾸준하게 이어져 왔다. 인천광역시는 1999년 우현의 생가 앞을 ‘우현로’로 명명했다. 2005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립박물관은 우현을 주제로 시민강좌를 열었고, 인천문화재단은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최근에는 인천 출신의 작가 이원규 선생이 우현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평전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어 시의회는 지난 1월 ‘우현의 길 조성 및 관리·운영 등에 관한 조례안’을 수정 가결했다.

이를 통해 우현을 기리는 공간이 조성되고 그 위에 그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스며들길 기대한다.


참고 고유섭,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 『춘추』(春秋) 1941.7


첨부파일
KOGL: Type 1 + Commercial Use Prohibition + Change Prohibition (Typ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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