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

광복절 특집 : 인천의 독립운동가

2025-08-12 2025년 8월호

광복 80주년, 

조국의 품에 새겨진 이름들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속 11개의 얼굴


어두운 현실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이들. 

이들 외에도 인천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QR코드를 스캔하시면

인천보훈지청이 선정한

인천의 독립운동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천시청 앞 펄럭이는 태극기, 하루 방송을 종료하며 나오는 애국가, 그리고 매 학기 듣는 국어 수업. 별다른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 하지만 평범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당연한 일상을 꿈꾸는 것조차 위험했던 시절, 그 어둠 속에서 당연한 하루를 되찾기 위해 

용기 낸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학생이었고, 누군가는 농민이었으며 잡화상이었다. 

그저 평범했던 그들. 그들의 용기와 희생 덕분에, 1945년 8월 15일. 이 땅에 큰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목청이 뜨거워지도록 외치던 그 말. 80년이 지난 오늘, 다시 한번 외쳐본다.

그날의 함성을 다시 새기며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11명의 인천 독립운동가를 만나보자.


글. 윤은혜 본지 편집위원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인천문화재단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체포 또는 재판 당시 거주지가 현재 인천광역시 관내에 해당하는 인물의 카드를 선별한 것입니다. 더불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죄목인 ‘소요’, ‘보안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사례만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김명진

김명진은 3.1 운동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가를 이끈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1902년 10월 9일생으로 검거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본적지와 주소는 인천부 내리 152번지로, 1919년 7월 25일 치안유지법, 주거 침입, 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김삼수

3.1 운동 당시 상가 철시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기록되는 인물. 조선인들에게 3.1 운동 참여를 촉구하는 전단을 뿌린 혐의로 체포됐다고 한다. 김삼수는 1901년 2월 17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 모두 인천부 내리 185번지다. 검거 당시 직업은 잡화상이다. 그는 1919년 9월 20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으며 1920년 4월 28일 특별 석방되었다.



임갑득

배다리 일대에서 가게 문을 닫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라는 ‘상가 철시’ 전단을 뿌렸다는 이유로 일경에게 잡혀 징역 6개월을 살았다. 임갑득은 1904년 8월 3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 모두 인천부 우각리 55번지다. 체포 당시 여관조합 직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으며 1920년 2월 27일 가석방됐다.



유봉진

강화 3.1 운동의 중심인물이다. 1887년 3월 31일생으로 본적지는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1번지이고 출생지와 주소는 경기도 강화군 군내면 관청리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임시정부 강화 환영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강화 지역사회의 중심 인물로서 꾸준히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염성오

강화 3.1 운동의 주동자다. 1878년 6월 4일 생으로 본적과 출생지, 주소 모두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반두리 269번지다. 체포 당시 그의 직업은 농민이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유봉진과 함께 강화 만세운동을 진행했다고 기록됐으며 1919년 5월 25일 강화경찰 서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경성지방법원 1심 에서 징역 1년과 벌금 20원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항소하여 징역 8월로 감형된 것으로 보인다.


유학용

유학용도 강화 읍내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크게 외쳐 치안을 방해한 죄를 받았다. 그는 1896년 2월 28일 생으로 본적과 출생지, 주소 모두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반두리 875번지다. 체포 당시 직업은 농업이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개월을 선고받고 당일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다. 이후 1920년 5월 23일 만기 출소했다.


심혁성

황어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 1888년 8월 15일생인 심혁성은 당시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에서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 시위를 했다. 이들은 인근에 있던 경찰에게 현장범이라는 명칭으로 잡혀갈 뻔했지만, 군중이 몰려와 심혁성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19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조명원

인물 카드에는 ‘조수동’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됐다. 1901년 7월 2일생으로 본적과 주소지는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다. 직업은 농업이며 신분은 양반이다. 조명원은 용유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운동사 제2권에 따르면 을왕리에서 이난의 등 많은 군중이 모여 조명원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관청리를 향해 시위 행진에 들어갔다고 기록됐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며 만기 출소했다.



조종서

조명원과 함께 혈성단을 조직하고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조종서는 1899년 8월 13일생으로 본적, 출생지, 주소 모두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다. 직업은 없으며 신분은 양반이었다. 그가 소속된 혈성단은 격문 80여 종과 신서 1통을 작성하였다. 그들은 각자 그것을 주민들에게 배부하였고, 만세 시위를 진행했다. 그는 1919년 7월 19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최봉학

최봉학, 조명원, 조종서, 문무현 등은 모두 혈성단이다. 조종서와 동일하게 격문 80여 종과 신서 1통을 작성하여 주민들에게 배부하였고 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도 1919년 7월 19일 보안법 위반으로 조종서와 함께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날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문무현

1899년 4월 17일생인 문무현은 거주지와 체포, 재판 시점 등을 볼 때 용유도에서 일어난 3.1 운동 관계자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은 3월 23일, 24일에 모여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웠다. 그도 혈성단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19년 9월 27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첨부파일
OPEN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의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료관리담당자
  • 담당부서 콘텐츠기획관
  • 문의처 032-440-8302
  • 최종업데이트 2025-03-12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