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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인천의 맛-영흥 바지락

2020-05-03 2020년 5월호

공존의 바다에서 캔,

영흥 바지락

인천만의 ‘그 맛’이 있다. 지역 음식에는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끝낼 일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인천의 산과 들에서 자라고, 바다와 갯벌에서 펄떡이고 있을 먹거리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맛을 기록한다. 그 아홉 번째는 개발과 보존 사이, 공존의 바다에서 캔 영흥 바지락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어머니의 섬

어머니의 섬이다.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6·25전쟁 때 배를 끌고 황해도 옹진에서 영흥도로 왔다. 바다는 주인이 따로 없었다. 땅을 잃은 사람들은 고향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 기대어 살아갔다. 동네 이름도 북에서 이르던 ‘가막개’로 지었다. 손에 물이 마를 날 없도록 갯것을 캐 내다팔고, 안동네 사람들이 농사지은 쌀과 바꿔 살림에 보탰다.


그래도 외가는 배를 부려 사정이 나았다. 외할아버지는 바다 깊숙이 들어가 물질하는 해남海男, ‘머구리’였다. 사람들을 모아 멀리 백령도, 대청도까지 가 전복, 해삼을 따와 하인천 부둣가에서 중국집을 하는 차이나타운 상인들에게 팔았다. 외할머니는 평생 차디찬 바람 맞으며 갯벌에 뒤엉켜 살았다. 물때만 맞으면 밤이고 새벽이고 바다로 나가 호미질을 해, 갯것을 잔뜩 이고 집으로 오곤 했다.

그 덕에 어머니는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신고, 책 보자기 대신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의 여섯 형제도 모두 육지로 나가 공부할 수 있었다. 먹고사는 형편은 좀 나았지만, 그렇다고 물기 어린 삶이 다르진 않았다. 어머니 역시 태어난 순간, 바다로 나가는 삶을 숙명처럼 짊어졌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작고 여린 손으로 바지락을 긁어다 살림에 보탰다. 섬 아이들은 그 힘든 일이 놀이인 줄 알고 다 그렇게 자랐다. 어머니는 일찍이 도시로 떠났지만, 대부분 평생 바다와 한 몸이 되어 살았다.


농어 바위 해변


갯벌, 전기와 바꾸다

어린 시절 기억에 외갓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연안부두에서 배 타고 큰 시곗바늘이 한 바퀴는 돌아야 닿던 섬을, 이제는 다리로 건너간다. 세상이 변해도 바다는, 섬은 그대로일 줄 알았다. 하지만 2004년 7월, 화력발전소가 세워지면서 섬의 운명이 바뀌었다.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다리도 놓았다. 2001년 11월, 영흥대교로 선재도와 이어지면서 ‘섬 아닌 섬’이 됐다.


“바지락이 안 나니 힘들어. 이렇게 캐서 어디 먹고살겠어.” 아직 찬바람이 부는 사월의 어느 날, 농어바위 해변. 영암어촌계 계원들은 바다가 품을 열자마자 이른 아침부터 갯벌로 달려 나갔다. 한창 바지락 수확 철인데도 소득이 영 시원치 않다. 1kg에 2,500원. 사리 내내 일해도 손에 대략 3만원이 쥐어진다. 바지락을 쓰레질하듯 주워 담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씨조개를 뿌려 다시 거둬들여도, 전만 못하다. 이름 그대로 농어가 많이 잡혀 풍요롭던 바닷가엔, 오늘 빈 굴 껍데기만 모래처럼 밟힌다.

“발전소가 세워지고 바다가 달라졌어.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신항이 들어서고 또 달라. 펄이 있어야 갯것이 사는데, 다 빨려 들어가 이제 잡을 수가 없어.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 이리 나와.” 임정일(77) 할아버지는 이 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다 다시 돌아왔다. 강산이 세 번 바뀐 사이 고향도 달라졌다. “땅이 변했어.” “딱딱해졌지. 갯벌이 다 깎여 내려가지고.” 쉴 새 없이 꼬챙이질을 하던 어르신들이 정적을 깨고 저마다 답답한 마음을 푼다. 육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바다의 벌판은 고요하다. ‘사그작사그작’ 호미질 소리만이 들려온다.



‘영흥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은, 섬의 토박이 정윤기 영암어촌계장


“고맙다. 먹고살게 해줘서.”
할머니의 흙 묻은 얼굴에, 말간 웃음꽃이 번진다.


자연과 개발, 그 가치의 무게

인천과 경기도 일대에 전깃불을 켜고, 섬사람들도 잘 살게 해줄 ‘보물덩어리’. 화력발전소를 섬에 들여놓으면, 다리도 놓아주고 뜨신 물도 맘껏 쓰게 해준다고 했다.
정윤기(49) 영암어촌계장은 학교 다닐 때 말고는 섬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영흥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섬의 모든 게 풍요로웠다. 배 타고 멀리 나가지 않고 바닷가에서 그물만 던져도 농어, 광어, 우럭이 척척 걸려들었다. 1990년대 중반, 한국전력공사(한국남동발전)가 섬에 화력발전소를 12기나 세운다고 할 때, 격렬히 맞서다 철창에 갇히기도 했다.


“풍요롭던 바다가 말라가고 있습니다. 개발에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자연을 지키며 발전하자는 거예요. 바다가 아프면, 땅도 죽습니다.” 바지락은 모래와 펄의 비율이 8대 2 또는 7대 3인 곳에 자리를 잡는다. 영흥도 일대가 최적지였다. 하지만 바람, 물결, 조석이 바뀌면서 갯벌이 사라져갔다. 섬 어르신들이 호미 하나 들고 자식들 키워내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누가 잘했다 못했다 말할 수 있나. 세월 따라 모든 게 변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섬사람들의 눈물겨운 ‘생존의 장’은 오늘 육지 사람들의 ‘체험의 장’이 됐다. 젊은이들은 매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바다 대신 발전소로 향한다. 갯장난하며 자라던 섬 아이들은, 큰 배가 오가는 신항을 바라보며 내일의 꿈을 키운다. 그렇게 섬사람들은 어떻게든 바다와 맞닿아 살아갈 것이다. “그간 많이도 캐 먹었지. 고맙다. 먹고살게 해줘서.” 허리 한번 펴지 않고 호미질을 하던, 진흙투성이 할머니의 얼굴에 말간 미소가 번진다.


대부도와 영흥도 사이 선재도 바닷가

갯벌과 개발, 그 가치의 무게는 어디로 기우는 것일까.
내일에서야,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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