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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메이커스, 인천 영림목재

2020-06-02 2020년 6월호

촘촘한 나이테

단단한 나무

오늘도 당연하게 쓰이는, 무심코 손에 닿는 물건들. 그 누군가가 일터에 틀어박혀 인생을 내어주고 만들어낸 것들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며 인천 그리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자랑스러운 ‘메이커스’를 만난다. 그 다섯 번째로 지나온 50년처럼 나아갈 100년, 촘촘하게 나이테를 채우며 더 단단해질 ‘영림목재’를 찾았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영림목재 박인성 부장.
미국 중부지역에서 들여온 250여 년 된 호두나무와 함께.


열대우림 속,  큰 나무와 만나다

미 대륙의 광활한 고속도로, 12시간을 꼬박 차로 달려 숲으로 간다. 찾는 나무가 없으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또다시 달려야 한다. 혼자 앞만 보고 가야 하는 기나긴 여정. 그 직선의 길 위에서 떠올리는 건, 오직 나무다.


‘영림목재’의 박인성(51) 부장은 스물네 살에 이 회사에 입사했다. 처음부터 목재에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매일 회사 문턱을 넘으며 자연스럽게 나무에 이끌려 원목 제재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30대 중반부터는 나무를 사기 위해 미지의 세계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 처음 발 디딘 곳은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의 열대림이었다. 
낯선 이국땅에 도착하자마자, 경비행기를 타고 서너 시간을 날아 밀림으로 갔다. 또다시 보트를 타고 장대한 강줄기를 따라 벌목장으로. 한 줄기 햇살 비집을 틈도 없는 빽빽한 우림 사이를 현지인들과 연결된 밧줄 하나에 의지해 걷고 또 걸었다. 원시와 문명이 충돌하는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벌거벗은 원주민들이 밀림을 누비고, 한편으론 귀를 찢는 굉음 속에 거목들이 쓰러져 갔다.


2018년 한 해 지구상에서 사라진 숲은 벨기에 면적과 비슷한 3만6,000km2나 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대한 미안함은 없을까. “합법적인 벌목은 나무를 자라게 하는 데 이롭습니다. 햇빛을 받고 뿌리내릴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또 나무는 잘린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잘린 나무도 ‘생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목재는 가공되어도 온도와 습도에 반응하며 살아 숨 쉰다.



남동산업단지에 있는 영림목재 우드슬랩 전시장.
‘메이드 인 인천’ 명품 가구가 이달 가구 유통의 메카 서울 논현동으로 진출한다.


나무에게 말을 걸다

“나무와 대화하라.” 영림목재의 이경호(70) 회장이 직원들에게 늘 하는 말이다. 벌목하는 나무에게는 ‘고맙다’ 말하고, 잘린 나무에게는 ‘만나서 반갑다. 어디서 왔느냐’ 묻고, ‘너를 만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에게 나무는 팔아야 하는 상품이 아니다. 나무였다가, 배였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의자 혹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정을 쌓는 식탁이 되기도 한다. 나무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고 친구다.


영림목재는 이 회장의 부친이 1969년 창업했다. 간석사거리 황량한 개발지, 포도나무를 뽑아낸 자리에서 직원 10여 명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대성목재와 선창산업 등으로부터 원자재를 사들여 포장 상자를 주로 만들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모두 가난하던 시절, 인천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생명 줄이었다.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 섬유, 목재, 제분, 기계공업 공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목재산업은 일찍이 1936년 대성목재를 시작으로 1959년 대일목재, 1961년 동양목재, 1969년 영림목재 등이 자리 잡았다. “당시는 나무의 쓰임새가 참 다양해 목재산업의 시장점유율이 엄청났습니다. 1970년대 수입 화물은 목재가 양곡 다음으로 많았고, 수출 품목으로도 목재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1936년 대성목재의 전신인 조선목재공업은 군수용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합판을 만들었다. 1960년대 합판산업은 우리나라 목재산업을 이끌며 전성기를 누렸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목재 원가가 상승하고 수출에서 내수로 시장 상황이 바뀌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영림목재는 그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나뭇가지를 뻗어가고 더 단단해졌다.


인천 목재산업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잇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아들,
영림목재 이경호 회장과 이승환 전무이사.
영림목재는 50년 역사 속에서
꿋꿋이 나뭇가지를 뻗어가며 더 단단해졌다.



나무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예술품’.


이미 시작된, 미래

‘멈추지 말고 가라.’ 이경호 회장의 경영 철학이다. 정해진 길은 없다. 자신을 믿고,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갈 뿐. 그는 부친의 회사를 이어받기 전에 당시 동양정밀과 대우실업에 입사해 4년 정도 일했다. 머무르는 순간 도태되는 전자업계 경력이 영림목재를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목재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연구개발R&D을 시작하고, 54세 되던 해에는 기업 일을 다 맡기고 일본에서 1년간 선진 목재산업을 배웠다. 그 사이 영림목재의 주력 상품은 포장재에서 악기, 원목으로 끊임없이 변화했다.


영림목재는 오늘 목재산업의 갈 길을 ‘우드슬랩Wood Slab’에서 찾고 있다. 수년에 거쳐 나무를 건조하고 가공해 본연의 나뭇결과 무늬를 살린, 세상에서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9년 전 국내에선 생소한 우드슬랩 시장에 뛰어들어, 오늘 놀랍도록 성장했다. 최근 본사가 있는 남동산업단지에 우드슬랩 전시장을 확장한 데 이어, 이달 가구 유통의 메카 서울 논현동에 매장을 연다.
“ ‘인천을 선택했다’ 아버지께서 늘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본사를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목재산업을 대표하는 인천 기업으로 아버지의 큰 뜻을 잇겠습니다.” 도쿄대 대학원에서 나무를 공부한 이 회장의 아들 이승환(38) 전무이사는 아버지 곁을 지키며, 인천의 목재산업을 거목으로 키우고 있다.


곳곳에 옹이가 깊게 박히고 굴곡진 오래된 나무. 그 안엔 향기 그윽한, 긴 시간의 굽이굽이가 살아 숨 쉰다.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영림목재는 이미, 다가올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나이테를 촘촘하게 그리며 더 단단해지고, 더 깊게 뿌리를 내릴 내일을.


남동산업단지에 있는 영림목재 본사.
생산시설은 충남 당진에 있지만, 그 뿌리는 흔들림 없이 인천에 있다.


영림목재 우드슬랩 전시장 ‘나무로’
인천 본사 Ⓣ 032-811-9058 
서울 매장 Ⓣ 02-511-2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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