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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인천의 맛 ⑬ 전통 발효식

2020-10-05 2020년 10월호

느리게 더 느리게

발효식

인천만의 ‘그 맛’이 있다. 지역 음식에는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 인천의 산과 들에서 자라고, 바다와 갯벌에서 펄떡이고 있을 먹거리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맛을 기록한다. 그 열세 번째는 느리게 더 느리게, 시간이 빚은 깊은 맛 전통 발효식이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장│사진 임학현 포토디렉터

세상엔 시간이 흐를수록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것들이 있다.
한잔의 위로, 한잔의 그리움으로 곡절 많은 시대 무수한 삶의 이야기를 품어왔기에.
마음 다해 술을 빚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증미蒸米를 마친, 인천전통발효진흥원의 임경환 사무처장


술 익는 마을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시인 조지훈과 박목월은 술잔을 기울이듯 시를 나눴다. 시는 짧지만 그 여운은 길다. 세상의 속도를 거스르며, 느리게 익어가는 술처럼.


“전통주는 쌀, 물, 누룩, 시간, 온도, 만드는 사람의 정성으로 정해집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집집마다 술을 빚어왔고, 맛과 향이 모두 달랐지요.” 명가명주名家銘酒, 즉 ‘이름 있는 집안에 맛있는 술이 있다’고 했다.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전통발효진흥원의 임경환(56) 사무처장은, 우리네 인생처럼 깊고 진한 맛을 내는 전통주의 명맥이 이어지길 바란다.
우리 민족은 긴 세월 술과 함께 희로애락을 겪어왔다. 우리나라 술의 역사는 삼한 시대 무렵 시작해 조선 시대에 이르러 고유한 ‘가양주家釀酒’ 문화로 발전했다.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 <양주방釀酒方> 등 조선 시대 50여 문헌에는 1,400여 종류, 4,000여 가지 전통주 제조법이 기록돼 있다. 어느 동네든 부뚜막마다 술 익는 냄새가 달큼하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더 이상 술을 빚을 수 없게 됐다. 1909년 일제가 주세법을 제정해 술에 세금을 매겨 걷은 것이다. 1916년엔 주세령으로 면허가 있어야만 술을 빚을 수 있었다. 사실상 가양주 금지령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비밀스레 술독을 만들고 밀주密酒하며 줄기차게 술의 생명력을 이어왔다. 그 가양주는 오늘 전통주傳統酒로 다시 태어나, 향기롭게 익어가고 있다.


삼양주로 빚은 석탄주惜呑酒


시간과 정성을

마시고, 나누다
전통주는 곡식과 천연 발효제인 누룩, 물을 주원료로 일정한 온도와 시간을 거쳐 숙성시킨 끝에야 완성된다. 담그는 과정이 한 번이면 단양주單釀酒, 밑술에 덧술을 더하면 이양주二釀酒, 덧술을 두 번 하면 삼양주三釀酒가 된다. “술은 한 사람의 정성을 마시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일수록, 술맛은 깊고 풍부해진다.


술 빚기의 첫 과정은 쌀 씻기인 세미洗米. 술맛을 좌우하는 작업이다. ‘물길로 닦는다’는 마음으로 한 방향으로 물빛이 투명해질 때까지 정성스레 씻는다. 이후 쌀을 물에 담가 수분을 머금게 하는 침미浸米에 3시간, 수분을 빼는 데 1시간, 고두밥으로 고들고들하게 찌고 뜸 들이는 증미?米에만 1시간을 들인다. 이번엔 식기를 기다렸다 쌀과 누룩, 물 등을 혼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최소 한 달 이상의 발효와 숙성 기간을 거쳐야 비로소 ‘좋은 술’이 세상의 빛을 본다.
“전통주는 살아 있는 술입니다. 누룩으로 발효시켜 유산균이 풍부하지요. 인공 감미료로 단맛을 내고 효모를 넣어 반나절 만에 억지로 만들어내는 술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천전통발효진흥원의 이주희(61) 이사장은 ‘배다리전통주학교’에서 전통주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워낙 술을 즐겨 주변에 걱정을 끼치기도 했는데, 전통주를 빚은 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즐거워해요. 술을 담가 맛이 덜하면 우리가 먹고, 맛있으면 나누지요.” 기쁨으로 발그레해진 받는 이의 얼굴을 떠올리면 취기가 돌듯 기분이 좋다.

느리게 익어가는 술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인천 유일의 전통주 ‘칠선주七仙酒’도 그렇게 사라졌다.



탈수脫水 

세미洗米



작말作末


​인천전통발효진흥원의 이주희 이사장. 느린 시간 속, 술맛이 깊어만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고 진한 맛

술뿐만 아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장류와 김치 같은 발효식이 집집마다 무르익었다. 인천전통발효진흥원은 먼지 쌓인 고서에서 ‘천년의 지혜’를 찾아 오늘 밥상 위에 올리고 있다.
서현(56) 씨는 이곳에서 장과 장아찌, 누룩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음식은 사람의 기운이 깃들수록 맛이 납니다. 밥상의 기본인 ‘장맛’은 시간과 그 집 아낙의 정성에서 판가름 나지요.” 그의 시골집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100년 넘은 간장이 있다. 이 순간에도 시간의 흐름 따라 ‘장 꽃’이 피고 지며, 깊고 진한 맛으로 익어가고 있으리라.
발효식이 건강에 좋은 것은 물론이다. 몸에 이로운 미생물이 풍부해 면역력과 자기치유력을 높인다. 임 사무처장이 발효식에 더 빠지게 된 건 지난해 말을 못할 만큼 병을 앓으면서다. 병원 치료와 함께 유기 발효 식초로 몸을 다스리면서 병을 이겨냈다. 발효식에 더 관심을 두고 많은 이들에게 알리게 됐다. “함께 배우고 나누다 보면, 그 기법이 인천의 전통이 되고 누군가는 명인이 되어 이어가겠지요. 지금은 사라진 인천 유일의 전통주 ‘칠선주七仙酒’도 다시 빚을 날이 곧 올 겁니다.”


식약동원食藥同源 ‘음식과 약은 그 뿌리가 같다’. 오랜 세월 참 많은 게 변했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 있다. 땅과 바다가 내어준 풍성한 먹거리에, 기다림의 미덕과 지혜를 더한 맛. 푹 익히고 삭힐수록 더 감칠맛 나는 우리네 인생 같다.



기다림 끝에 탄생한 정성의 결정체



시간으로 음식을 익히는 ‘천년의 지혜’


취재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qv50uxURX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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