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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 줌인 ② 인천 출신 고정수 조각가, 작품 40점 고향에 기증

2021-05-01 2021년 5월호


세계적 조각품, 인천 품에 안기다

글·사진 김진국 본지 총괄편집국장 │사진 제공 고정수

고정수 조각가가 작품 40점을 고향 인천에 기증했다. 지난 4월 2일 박남춘 인천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귀하께서는 인천 문화예술 발전과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미술 작품들을 기증함으로써 지역 미술 작품 기증문화 조성에 귀감이 되었기에 감사의 뜻을 담아 이 패를 드립니다.’
지난 4월 2일 인천광역시청 시장실. 박남춘 인천시장이 한 초로의 예술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감사패의 주인공은 조각 작품 40점(시가 16억원 상당)을 기증한 고정수(74) 조각가였다. 그는 예술 작품을 기증하는 1호 기증자로 기록됐다. 박 시장은 “인천시는 표상이 될 만한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며 덕담을 건넸고, 고 작가는 “제 작품을 받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가 고정수가 기증한 작품(사진)은 1970년대 시작한 여체에서부터 최근작인 곰에 이르기까지 테라코타, 대리석, 브론즈 등을 재료로 한 것들이다. “우연한 기회에 서상호 인천시 문화예술과장께서 작업실 양평으로 찾아와 기증을 권유하셔서 결심을 굳혔습니다.” 고 작가는 “인천은 나의 뿌리이고, 인천이라는 토양에서 자양분을 섭취해 오늘의 내가 형성됐고 존재한다”며 “열매이자 결과물인 나의 분신 작품을 고향에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여인 아니면 곰이다. 후덕한 얼굴은 통통하고 몸은 풍만하다. 생명을 잉태하고, 산고의 고통을 인내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여체’가 그의 작품 주제다. 내면이 더 아름답고 강건한, 어쩌면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아들 하나 잘 키우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시고, 교통사고 치료비조차 등록금으로 내주신. “어렸을 때 집이 몽땅 불에 타 가세가 기울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불편하신 몸으로 차 밑에 들어가 기름때를 닦고, 구멍가게와 식당을 전전하며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 어머니를 보며 한국 여성만의 미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었지요.”
고 작가는 그렇게, 여인상에 몰입한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내면을 끄집어내야 했다. 부드러운 곡선의 풍만한 여인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한없는 모성애를 품은 인내와 포용의 바다처럼 너그러운 여인. 그게 바로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전통적 여인상이며 그 작품의 본질이기도 하다.


회고-II 43x38x30cm 테라코타 1979


사랑과 미움 20x21x15cm 브론즈 2014


세 자매 58x36x35cm 대리석 1992

자매-XI 77x35x35cm 브론즈 1983

서 있는 사람 167x75x70cm 화강석 1995

자매-11 160x90x60cm 브론즈 1981

Figure 86-5 39x62x27cm 대리석 1986


그런 그가 작업의 주제를 곰으로 바꾼 때는 2014년이다. 주제의 일관성 속에서 새로움에 도전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곰은 여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단군 신화를 보면 곰은 동굴 속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웅녀로 태어나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왕검을 출산했지요. 곰 역시 인내심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체에서 곰으로 전환하면서 그의 작품엔 해학이 가미된다. 두 곰이 비스듬히 머리를 맞댄 채 미소를 띤 작품 ‘사랑과 미움’처럼, 그의 곰 작품들은 표정이 밝고 동작이 재미있다. 곰 작품은 사람들이 세상을 밝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지금 경기도 양평의 복합문화공간 ‘카포레’에서 ‘고정수 50년전’을 진행 중이다. 반세기 동안 그가 빚어낸 작품 167점을 볼 수 있는 회고전이다. 김수환 추기경 흉상을 포함해 그의 50년 예술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5월 31일까지다.
고 작가는 지금 양평에서의 삶을 정리 하려고 한다. 귀향을 위해서다. “인간은 누구나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대학교수가 되기 전까지 고향에서 살았어요. 나이 탓일까요. 바닷물이 넘나드는 갯벌에서 발가벗고 물놀이하던 어린 시절, 자유공원과 청관, 하인천 부둣가에서 그림을 그리던 학생 때 기억이 자꾸 떠오릅니다.” 박찬훈(49) 문화관광국장은 “인천이 고향이라는 순수한 이유만으로 귀한 작품을 기증해 주신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며 “인천시에 기증문화가 잘 정착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서 있는 사람 167x75x70cm 화강석 1995

자매-11 160x90x60cm 브론즈 1981

Figure 86-5 39x62x27cm 대리석 1986


고정수는
중구 신흥동(3가 26번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옛 자유극장 건너편 모퉁이에 있던 제일사주유소 옆 자동차 정비공장이 그의 집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2학년 때 화재가 발생한 뒤 가세가 크게 기운다.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인천남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가정 형편상 생업을 위해 인천기계공고에 입학했으나 미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3학년 때 인천남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다. 이때 송덕빈 교사로부터 기초 소묘와 조형 감각을 배웠고 홍익대 조각과에 입학한다. 대학 2학년 때 국전에 입선하고, 1979년 문화공보부 장관상, 1981년 대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대학교 교수가 됐으나 보다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41세 때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한다. 이후 작품에만 전념해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국회의사당, 한국방송공사, 대한항공, 신라호텔, 호림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홍익대학교박물관, 광주시립미술관, 인천일보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품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1992)가 미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작업실에서 곰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고정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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