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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소한 인천

2022-02-04 2022년 2월호


인천 지명

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담긴 백마장


현재 산곡동 일대를 과거에는 백마장이라 불렀다. 아직도 어르신 들은 산곡동 입구보다는 백마장이 더 익숙한데, 그 유래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한자 이름 때문에 백마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예상하지만 그 역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과거 산곡동과 인근의 효성동, 청천동에 국영 목장이 있었고 말을 먹여 기른 곳 이어서 ‘마장馬場’ 또는 그 발음이 조금 변한 ‘마제이’라 부르기는 했으나 백마장은 이와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백마장으로 불려온 산곡동은 원래 조선 말기에 부평군 마장면 산곡리였다. 그 뒤 이곳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 역 개편 때 부천군으로 편입되어 부내면 산곡리가 되었고, 1940년 인천부가 행정구역을 넓힐 때 다시 인천부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시 인천시장 격이던 인천부윤人川府尹 나가이 데라오(永井照雄)가 인천 전 지역의 동洞이나 리里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고쳐 버렸다. 이 과정에서 산곡리에는 백마정白馬町이란 이름이 붙었다. 일설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군대 훈련장이 있어서 백마를 타고 훈련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나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백마장은 광복 이후 우리말로 ‘백마정’이라 했는데, 일본식 행정구 역 명칭인 정町이 장場으로 바뀌면서 오랫동안 백마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인천 소사


1951. 02. 03
제2차 인천상륙작전 개시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중인 1·4후퇴 이후 북한군이 점령했던 인천시에 상륙해 재탈환한 전투를 말한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대한민국 국군 170여 명에 불과했다. 1950년 9월 15일 제1차 인천상륙작전에 연합군 함정 261척과 7만 1,339명의 상륙군이 동원됐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소규모 병력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당초 유엔군의 서울 공격에 앞선 위장 상륙작전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의 기지와 노력으로 인천을 완전히 탈환하게 되었고 인천항을 통해 군수물자 지원이 가능해지면서 그해 3월 15일 서울이 재탈환되는 등 반격 작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


그때, 2월의 인천은…
1891. 02. 01  인천성공회, 영어야학교英語夜學校 개교
1893. 02. 01 타운센드정미소 설립(한국 최초의 증기력 응용 정미 공장)
1904. 02. 09 인천항에서 러일해전 발발
1946. 02. 04 중국에서 광복군 500여 명, 인천항에 도착
1951. 02. 03 제2차 인천상륙작전 개시
1978. 02. 14 인천항과 이란의 코람샤항 간 정기 항로 개설, 티카호 첫 입항
1982. 02. 05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
1983. 02. 14 인천직할시교육위원회, 교복 자율화 허용
1986. 02. 25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 프랑스 순양함 앙리호 인천항 방문
1991. 02. 27 인천-목포 간 서해안 고속도로(총연장 353km) 착공
2013. 02. 28 인천경제자유구역청, I-Tower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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