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천 문화재 이야기 ⑭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인천개항박물관)
개항기 역사
한눈에 볼 수 있는
개항박물관으로
꽃 피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
르네상스 양식의 돔형 지붕과 화강암으로 마감한 외벽. 인천개항박물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 인천시 중구 신포로 23번길 89)은 한눈에 봐도 견고하면서도 예술적으로 다가온다. 좌우 대칭의 이 건물 지붕 한가운데엔 돔을 얹었으며 처마 용마루엔 바로크풍의 장식창이 눈에 띈다. 경사진 지붕엔 본래 기와가 얹혀져 있었으나 지금은 걷어내고 다른 것으로 개조한 상태다.
밤색 아치형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실내 공간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건물의 중앙 돔 양옆으론 ‘도머창’이 나 있고 2층의 창문도 보인다. 언더우드타자기, 낡은 표지의 감리교 찬송가책에서부터 ‘昭和四年(소화4년·1929)’이란 글씨가 찍힌 영화여자보통학교 졸업증서도 눈에 들어온다. 아치와 석조 등 완벽한 서양식 건물인 이 박물관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899년이다. 설계자인 니이노미 다카마사(新家孝正)는 돌과 석재, 시멘트와 목재 등 주재료를 일본에서 들여와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을 완공했다. 일본제1은행은 예금과 대출을 다루는 지금의 은행과는 다른 성격을 띠었다.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빼돌리거나 일본인에게 토지매입자본을 공급하는 것이 일본제1은행의 주 업무였다. 한마디로 조선 수탈의 첨병이라 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이 창립한 1909년 이 건물은 ‘한국은행 인천지점’, 1911년엔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인천 경제를 쥐락펴락한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미군정이 인천에 주둔하던 시기 이 건물은 미군들의 사교장인 ‘댄스홀’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본이 패방하며 인천 사람들은 일제의 흔적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워낙 건물이 단단해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열전도율이 낮은 화강암 건물이다 보니 겨울엔 냉장고 같은 건물이 되었다. 모든 것이 어수선한 시기, 실용적인 건물로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미군들이 들어가서 춤추고 노는 임시위락시설 역할을 잠깐 했던 것이다. 광복 이후 한국은행이 인천지점으로 사용하던 이 건물에 ‘조달청 인천지점’이 들어온 건 1980년이다. 1996년엔 ‘인천 지방법원 등기소’, 1997년 (사)인천문화발전연구소, 상설의류매장 등으로 사용되다 2000년부터 중구가 맡아 관리 운영해오고 있다.
인천 중구는 2006년부터 박물관을 조성하기 시작, 2010년 개항기 인천으로 들어온 근대문화와 유물을 모아놓은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재탄생시킨다. 인천 개항장의 근대 문물, 경인철도와 한국철도사, 개항기의 인천 풍경, 인천 전환국과 금융기관 등 박물관은 4개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처음 지을 당시 이 건물엔 본관, 금고동, 부속동, 창고동, 사택 등이 들어서 있었다. 박물관 우측 뒤편 창고형 금고엔 현재 제4전시실이 들어섰으며 수장고로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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