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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옴니버스 소설 -아무도 울지 않는 밤

2022-05-02 2022년 5월호


우리가 마주한 밤



글 안보윤
일러스트 송미정

영석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출근 버스에서 내려 회사를 향해 걷는 동안 생각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체 뭘까. 뭐가 이렇게 마음 한편을 짓누르는 걸까.
딱히 눈에 띄는 문제는 없었다. 영석은 남동공단 내 위치한 가구 회사에서 17년간 근속해 왔다. 차장 직급으로 승진하기까지 동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어울렸고, 복잡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서로의 경조사에 정해진 만큼만 돈을 부치는 관계였지만 직장 사람들과 무람없이 친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당연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영석은 자꾸만 골똘해지게 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전력 질주를 하다 멈추면 돌연 한기가 도는 것처럼 영석은 자주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하네. 영석은 혼잣말을 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차장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후배가 영석을 보자마자 물었다. 영석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얼굴이 핼쑥해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 탕비실 문을 열고 나오던 동기가 말을 얹었다. 오늘 내 얼굴이 많이 안 좋은가 의심하면서도 영석은 대답했다. 괜찮아, 난 항상 괜찮지. 그러나 지나가던 임 과장이 하루 더 쉬지 그랬어,라고 말했을 때에는 이게 다 무슨 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어제 아프다고 조퇴했잖나.”
“제가요?”
어제 점심시간 직후 파랗게 질린 얼굴로 조퇴한 사람은 박성일 차장이었다. 똑같이 박 차장이라 불리지만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터무니없는 착각을 따져 물을 새도 없이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박 차장, 그러니까 어제 조퇴를 해 모두의 걱정을 산 장본인이 들어섰다. 여전히 낯빛이 좋지 못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후배가 박 차장에게 다시 물었다. 계속 몸이 안 좋으면 얘기하게. 임 과장이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영석은 괜찮습니다, 난 이제 괜찮네,라고 답하고 있는 박 차장을 바라보았다. 흐린 이목구비에 잿빛 얼굴, 어디서나 살 수 있을 법한 와이셔츠와 군청색 넥타이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안쪽으로 말린 좁은 어깨 때문에 옆모습이 구부정해 보였다. 그것은 실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영석은 탕비실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거울 속에는 흐릿하고 구부정한 중년 남자가 잿빛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 차장, 자네 괜찮나? 영석은 저도 모르게 거울 속 사람에게 물었다.
영석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 누군가 말을 건네면 대답하고 데이터를 원하면 보내줬다. 잠시 골똘해졌다가 고개를 드니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당황한 영석의 눈에 정오를 조금 지난 시계가 보였다. 누군가 영석에게도 점심을 권했을 테지만 대답까지는 필요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줄곧 느껴왔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영석은 17년간 한자리에 있었으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꼭 영석일 필요는 없었다. 누구든 대신할 수 있는 사람, 군청색 넥타이만큼이나 존재감 없는 사람, 그게 바로 영석이었다.
퇴근길에 영석은 사거리 편의점 앞에서 딸과 마주쳤다. 영석의 딸 민서는 커다란 목소리로 아빠! 하고 불렀다. 틀림없이 영석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영석은 안쪽으로 굽어 있던 어깨가 조금 펴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든 비닐봉지를 끌어안은 민서가 영석을 향해 달려왔다. 아빠, 잠깐만. 영석 옆에 서기 무섭게 민서는 반대편 골목을 살폈다. 목을 길게 빼고 이쪽저쪽을 꼼꼼히 살핀 뒤에야 이제 가도 돼,라고 말했다.
“누구 만나기로 했어?”
“만나기로 한 건 아닌데, 가끔 유영이가 굉장한 속도로 저기서 달려 나오거든.”
민서가 낮은 담이 늘어선 주택가 안쪽을 가리켰다. 유영은 민서의 오랜 친구였다. 피겨스케이트를 한다던 유영의 오빠가 쫄쫄이를 입고 온 집 안을 뛰어다녔다는 얘기를 언젠가 들은 것도 같았다. 영석이 기억을 더듬는 동안 민서가 조잘댔다.
“예전에 아빠가 그랬잖아. 친구가 힘들어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캐묻지 말고 그냥 칭찬해 주라고. 너 멋있다, 너는 이런 점이 참 근사해. 그렇게 진심으로 칭찬해 주면 기운을 낼 거라고 말이야. 아빠 말이 맞았어. 유영이가 힘들어하는 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칭찬해 주면 유영이가 기뻐해.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여. 그래서 여기서 가끔 기다리는 거야. 유영이 칭찬해 주려고.”
민서와 나란히 걷고 있던 영석이 걸음을 멈췄다. 영석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건 민서가 초등학생일 때 해줬던 얘기였다. 아빠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해? 영석이 묻자 민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빠가 해준 말은 전부 다 여기 들어 있어.”
민서가 가슴께를 팡팡 두드렸다. 영석의 마음속에 희미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가볍고 따뜻하고 가만히 흔들리는 작은 숨 같은 것이었다. 영석의 어깨가 조금 더 반듯하게 펴졌다. 회사에 있는 동안 영석은 아득한 물 위를 홀로 떠도는 기분이었다.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한 채 무력하고 공허한 시간 속을 맴돌았다. 주위엔 영석처럼 뼈대가 드러난 낡은 배들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영석에게는 민서라는 빛나는 노가 쥐여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영석이 말했다.
내가 바로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어.

영석이 손을 뻗어 민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서가 의아한 얼굴로 영석을 올려다보았다. 영석의 눈과 입매가 조금씩 둥글어졌다.
“그런데 편의점에는 왜? 필요한 거 있음 아빠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아빠가 다 사다 줬을 텐데.”
“아니야, 그럼 안 돼!”
민서가 돌연 큰 소리를 냈다. 게걸음으로 조금씩 영석에게서 비켜선다 싶더니 품에 안고 있던 비닐봉지를 뒤로 숨겼다. 아빠가 보면 안 되는 거야? 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영석은 짐짓 모르는 척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둥글어진 입매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서 뒤에 숨은 비닐봉지가 바스락바스락 작은 소리를 냈다. 벌어진 틈으로 이파리 하나가 비집고 나오더니 꽃대 하나가 불쑥 솟았다. 겹겹이 포개진 꽃잎들이 민서의 걸음에 맞춰 살랑거렸다. 내일이면 영석의 책상 위에 놓여 빛을 머금게 될 작은 카네이션 화분이었다.



안보윤 | 1981년 인천 출신.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자음과모음문학상 수상.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7의 고백>,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 <밤의 행방>, 중편소설 <알마의 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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