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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옴니버스 소설 - 아무도 울지 않는 밤

2022-11-01 2022년 11월호


밤의 시작과 끝


글 안보윤

일러스트 송미정


동현은 자신의 몸보다 큰 이불 보따리를 끌어안고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불은 크고 부드러웠으나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이사한 뒤 반년이 넘도록 상자 안에 방치되어 있던 탓이었다.
짙은 회색의 구스 이불은 동현의 어머니가 사다 준 것이었다. 동현의 자취방을 처음 찾아오던 날 어머니는 붕어빵 한 봉지와 이불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왔다. 따뜻한 것과 뜨거운 것, 어느 쪽을 받아들어도 더운 것이 한 손에 남았다. 작고 낡은 집들을 전전하는 동안 동현은 줄곧 이 이불과 함께였다. 자리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면 두툼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달콤한 팥앙금 냄새가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혹독한 경험을 할 때마다 동현은 이불 속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안전한 기분과 다정한 위로. 가족을 떠나 혼자 살게 된 뒤로 동현에게는 그런 것들이 자주 필요했다.
동현은 사거리 편의점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골랐다. 동네 동쪽에 자리 잡은 원룸촌에는 24시간 운영되는 무인 판매점이 많았다. 편의점 맞은편 건물에도 셀프 빨래방과 인형 뽑기방이 나란히 위치했다. 동현은 빨래방으로 들어가 세탁기에 이불을 넣었다. 자판기에서 구매한 세제를 집어넣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뒤에서 돌연 큰소리가 났다.
“세제, 따로 넣어야 하는 거였어요?”
돌아보니 동현 또래의 여자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탁기도 건조기도 전부 세제 넣어야 해요. 동현의 말에 여자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망했네, 망했어. 세탁기 버튼을 누르던 동현이 여자의 혼잣말에 작게 웃었다.
“예전 동네에서 다니던 빨래방은 세제가 자동으로 투입되는 방식이었거든요.”
“아, 새로 이사 오셨군요.”
“일주일 정도 됐어요. 이 동네에 오래 사셨어요?”
동현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이면 오래 산 듯도, 아닌 듯도 해서였다.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여자가 있는 테이블 위에 작은 생수병과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세탁기 두 대가 동시에 돌아가면서 미묘하게 어그러진 소리를 냈다. 동현은 여자가 앉은 테이블 반대편 끝에 앉았다. 저기…… 뭘 좀 여쭤봐도 될까요? 잠시 머뭇대던 여자가 동현에게 물었다.
“그 고양이, 왜 이름이 만두예요?”
“네?”
“실은 제가 이 위층에 살거든요. 제 방 창문을 열면 편의점이 정면으로 보여요. 편의점 테이블이랑 상자로 만들어준 고양이 집도요. 그쪽이 고양이랑 놀아주는 모습도 여러 번 봤어요. 머리가 엄청 큰 얼룩 고양이, 그 애 이름이 왜 만두예요?”
동그란 세탁기 창으로 뱅글뱅글 돌고 있는 이불이 보였다. 건조기까지 다 돌리려면 넉넉잡아 두 시간은 걸릴 터였다. 그냥 만두가 아니에요. 동현이 여자에게 말했다.
“풀 네임은 왕만두. 머리가 엄청 큰 고양이답게 왕씨랍니다. 미남이고요.”

여자의 이름은 정연으로 동현보다 한 살이 많았다. 정연은 자신의 빨래가 모두 건조된 뒤에도, 동현의 이불이 건조기 속으로 옮겨간 뒤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빨래들을 천천히 개켜 천 가방 안에 챙겨 넣으며 정연은 여전히 동현과 대화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고양이에서 날씨, 직장 얘기를 돌아 취미 이야기로 흘러갔다. 정연은 달리기가 취미라고 했다.
“이 동네로 이사 와서 좋은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고양이에게 친절한 거예요. 그런 동네는 왠지 정감 있어 보이잖아요. 둘째는 달리기 딱 좋은 산책길이 있다는 거고요.”
“여기에 산책길이 있어요?”
“그럼요. 길이 제법 재미있어요. 저기 북쪽에 있는 언덕이 정면에서 보면 엄청 가파르잖아요? 계단도 많고 비탈길이고. 근데 뒤로 빙 돌아서 가면 이팝나무랑 철쭉을 잔뜩 심은 흙길이 있어요. 중간에 식수대도 있고 언덕 꼭대기에는 배드민턴 치는 공터도 작게 있고요. 그 길이 이 동네 전체로 이어져요. 언덕 꼭대기에서부터 동네 동쪽에 있는 작은 카페와 빵집들이 있는 골목, 남쪽 아파트 단지와 연결된 가족 공원, 서쪽 주택 단지 끝에 있는 재래시장까지 전부 하나의 길로 연결돼 있거든요.”
다채롭고 조화로운 산책길,이라고 정연은 말했다.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동현은 재래시장의 기름떡볶이와 카페에서 파는 무화과 스콘, 흙길에 누군가 심어두고 간 튤립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연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정연 씨, 혹시 여기 이사 올 때 부동산에서 그런 얘기 못 들었어요? 이 동네는 동서남북의 정체성이 완전히 다르다고.”
“들었어요. 근데 사람들 사는 모습이 어떻게 다 똑같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다르죠. 어떤 집에 사느냐가 그 집에 사는 사람을 정의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가요. 동현이 중얼거렸다. 건조기에서 종료음이 울린 건 그때였다. 잘 마른 이불을 끄집어내자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쳤다. 정연이 커다란 행어를 빨래방 중앙으로 끌어오더니 동현더러 이불을 그 위에 걸치라고 말했다. 왜요?
동현이 묻자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자신의 생수병을 들고 온 정연이 씩 웃었다.
“이제 두드려야죠.”
정연이 생수병으로 이불을 가볍게 두드려 보였다. 세탁되는 동안 잔뜩 뭉쳐 있던 깃털들이 가벼운 타격음과 함께 고르게 퍼졌다. 생수병을 건네받은 동현이 구석구석 뭉친 부분을 찾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불이 펄럭, 움직일 때마다 채 식지 않은 열기가 공기 중에 퍼졌다.
“이게 참 사람 마음이랑 똑같아요.” 정연이 말했다.
“뭉치고 비뚤어진 마음은 차근차근 오래 다독여줘야 풀어지잖아요. 단단하게 엉켜 있는 것처럼 보여도 풀어놓고 보면 깃털 솜털에 불과한 것을요. 그런데 이거, 관리 잘하셨네요. 아끼는 이불인가 봐요.”
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끼는 것. 듣고 보니 그랬다. 짙은 회색의 구스 이불은 단지 비싸고 좋은 것이 아닌 따뜻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홀로 남겨진 밤을 부드럽게 감싸준 말 없는 위로이기도 했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남모를 응원이기도 했다. 가격으로 따질 수 없는,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가 생겨나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
“정연 씨가 말했던 그 산책로 있잖아요, 동네 전체로 이어진다던. 거길 언제 같이 달려도 될까요?”
동현이 물었다. 정연은 어느 틈엔가 동현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동현이 깃털을 펴는 동안 이불이 걸린 행어가 쓰러지지 않도록 내내 받쳐준 모양이었다. 정연의 미소와 함께 포슬포슬한 온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 깃털 하나가 위로,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


안보윤 | 1981년 인천 출신.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자음과모음문학상 수상.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7의 고백>,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 <밤의 행방>, 중편소설 <알마의 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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