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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인천무형문화재와 차 한잔 - 목조각장 이방호

2023-02-01 2023년 2월호

혼을 갈아 깎아낸 나무 부처님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안영우 포토그래퍼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부처님의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단단한 통나무가 부처님으로 피어나기까지 수십, 수백 개의 조각칼이 스쳐 지나갔다. 웃는 듯, 혹은 사유에 잠긴 듯한 눈매. 부드럽게 다문 입과 커다란 귀. 장인은 그렇게 지난 수십 년간 혼을 갈아 부처님을 깎고 또 깎았다.
마무리 작업은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것이다. 사포를 쓰면 수월하지만 이방호(66) 목조각장(인천시무형문화재 제22호)은 끝까지 조각칼만 고집한다.
“조각칼로 시작해 조각칼로 끝내는 것, 그게 우리 전통 방식입니다.” 인천시 계양구 다남로 143번길 33 ‘반딧불목공예 카페’. 계양산 산기슭 다남동은 그의 작업장이자 그가 태어난 고향 땅이다. “저도 선친도 할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살았어요.”
처음엔 작업실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목공예 전시실과 카페를 열게 됐다. 수백 개의 조각칼과 톱밥이 두껍게 쌓인 그의 작업장은 카페 뒤에 자리한다. 이 고요하고 어두컴컴한 작업실에서 그는 망치로 끌을 내리치고 자귀와 조각칼로 나무를 다듬는다. 온화한 부처님의 미소를 만나기 위해. 이 목조각장이 조각칼을 처음 잡은 시기는 10대 중반이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방황하다 학업을 위해 서울에서 공방을 하시는 고모 집으로 올라갔지요. 그때 사촌 형이 목조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 좋아 보이더라고요.”
옆에서 기웃거리며 관심을 보이는 동생에게 사촌 형은 조각칼을 쥐여 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사촌 형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박찬수 선생을 소개해 준다. 동생의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범상치 않게 본 것이다.
새로운 스승 아래서 ‘서각-판 조각-입체 조각’의 체계적 코스를 거친 이 목조각장은 독립하면서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조각한 불상을 일본으로 수출하며 일취월장하던 그는 1990년대 우리나라 불상 조각의 대가 전기만(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선생을 찾아간다.
“인정은 받았지만 더 배우고 싶었어요. 조선 시대 목조각을 계승한 스승님은 당시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불상을 조각하고 계셨는데 무작정 찾아가 큰절부터 드리고 본격적인 불상 조각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금산 산속에 계시는데, 1년에 두 번 정도는 찾아뵙고 있어요.”
일본으로 수출하는 불상과 우리나라 불상은 표정 자체가 달랐다. 일본 불상은 예쁘장한 반면, 우리 불상은 인자한 표정을 빚어내야 했다. 그걸 바꾸는 데만 15년 넘게 걸렸다.
좋은 불상이 탄생하려면 나이테가 촘촘한 나무를 골라 2, 3년간 건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나무의 갈라짐이나 변형을 막을 수 있다. 부산 백련사 백의관음보살상, 제천 정방사 관세음보살상을 비롯해 그의 영혼에서 탄생한 불상만 수백 점에 이른다. 2009년 인천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지만 지금도 눈만 뜨면 작업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겨울 아침, 자신이 형상화하고 있는 부처님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부처님의 미소’가 피어난다.


이방호 목조각장이 작업실 앞 '반딧불 카페' 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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