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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1885년 부활절 첫발, 이 땅의 ‘성탄聖誕’을 밝히다

2014-11-28 2014년 12월호


1885년 부활절 첫발,

이 땅의 ‘성탄聖誕’을 밝히다


황무지 같았던 땅에 한 줄기 햇살이 비추었다. 새로운 바람이 불고, 듣지 못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130년 전, 겨울의 날 선 찬바람을 비집고 찾아온 봄은 새로운 씨앗을 틔우기 좋은 날이었다. 제물포에서 꽃 피운 홀씨는 조선 땅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2014년 12월. 추위를 파고드는 성탄의 캐롤이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다.

글·사진 차지은 자유기고가



한국 교회의 어머니 땅

거친 파도를 헤치며,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생명을 건 항해의 종착지는 조선 땅 작은 포구 제물포. 한 청년은 일본에서 구한 조선어 ‘마가복음서’를 두 손에 꼭 쥐었다. 낯선 땅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른 청년은 임신한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길, 두려움보다는 사역에 대한 다짐과 의지가 작은 배 안에 가득했다.
1885년 4월 5일. 그렇게 그들은 제물포에 닿았다. 햇살이 가득한 오후 3시. 그날은 조선 땅에서 처음 맞는 부활절이었다. 포구는 고요했다. 작은 배 몇 척만이 일렁이며 바위에 퉁퉁 부대끼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들을 맞아주는 것은 이름 모를 바다 새와 거대한 바위 돌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와 함께 이 땅에 왔다.



그때부터였다. 이 땅 기독교(개신교)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세 사람은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였다. 조선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첫 선교사들이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으로 정세가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교육, 문화, 의료 등의 영역에서 활동하며 복음과 개화에 앞장섰다.
감리교 목사였던 아펜젤러는 아내 D.엘라와 함께 인천 내리(내동)의 한 초가집에 머물며 선교를 시작했다. 그해 7월 증기선을 통해 오르간(풍금)이 도착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오르간 반주에 맞춰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 땅에서의 첫 공식 예배를 드렸다. 부부의 예배는 밀알이 되어 인천내리교회로 이어져 꽃을 피우고 후에 조선 개신교의 열매를 맺게 된다. 내리교회가 ‘한국 교회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념탑과 기념탑 교회
기독교의 씨앗이 인천에 처음 뿌려질 수 있었던 것은 개항의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파라다이스(옛 오림포스)호텔이 자리한 언덕 바로 밑은 바닷가였다. 그곳으로 바깥 세계의 문물과 사람이 들어 왔다. 선교사들도 그곳에 첫 발을 내디뎠다. 
바다와 포구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첫 발을 디딘 자리에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6년 선교 100주년을 맞아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탑은 한국 교회 전통적인 종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으며 세 선교사의 청동상과 3개의 탑신, 6면의 부조 및 원형의 석조 계단으로 구성돼 있다. 3인의 청동상 밑엔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 드렸던 기도문을 새겨 넣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을 바라보는 푸른 지붕의 3층 건물이 있다. 박철호 목사가 세운 ‘기념탑교회’다. 이 건물은 원래 ‘객주(客主)집’이었다. 부두 화물이나 생선의 매매를 주선하거나 위탁 판매를 하던 집이다. 나중에는 잠시 다다미가 깔린 공동주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집은 일제 대정(大正)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대정시대는 1911년부터 1924년까지다. 길면 100년 짧아도 90년 된 건물이다. 얼마 전까지 5대에 걸쳐 살아온 이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콘크리트 건물 같은데 실은 목조건물이다. 벽은 대나무로 엮고 짚을 섞은 진흙을 엉겨 만들었다. 1992년 작은 화재가 난 후 슬레트벽을 덮으면서 콘크리트 건물처럼 보였다. 이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6월부터 기념탑교회가 자리 잡은 것이다.
박 목사가 사재를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회를 세운 것은 이 자리가 가진 ‘역사성’ 때문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향토 역사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목회를 하기 전엔 ‘숭의교회 75년사’, ‘내리교회 110년사’ 등의 초기 부분 집필에도 참가했다. 교회사를 집필하다보니 한국의 선교 역사에 대해 더욱 깊게 공부하고 싶었다. 인하대학교 대학원 근현대사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그가 찾은 역사의 현장이 바로 여기, ‘기념탑교회’의 자리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역사성을 살려 세워진 것이잖아요. 당시 (기념탑을 가리키며) 저 곳이 바다였을 테니, 세 선교사가 첫 발을 디딘 땅은 바로 이 교회가 있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시작이 된 장소에서, 그들을 우리가 기억하자는 의미로 이곳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거죠.”
현재 기념탑교회는 한미영 담임목사가 이끌어가고 있다. 박 목사는 지난 9월 목사직을 사임하고 교회를 관리하는 교인으로 남았다. 교회 안은 그날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고스란히 펼쳐진다. 당시 세 선교사를 맞이했던 큰 바위는 건물 1층 내부에 그대로 남아있다. 개항기 인천의 모습을 담긴 지도는 당시의 현장을 실감있게 보여준다. 벽면을 따라 선교자의 이름과 한국 선교의 역사가 이어진다.
박 목사는 “교회 건물 2층에 꾸민 자신의 살림집은 ‘선교사 기념관’으로 꾸밀 예정.”이라고 말한다. 이제 한국의 선교사가 오히려 해외에 나가는 이 시점에서 선배 선교사들의 희생이 잊혀질까 아쉬운 마음에서다.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조용하더라고요. 본질을 잊고 지내는 것 같아 교인으로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 어려운 이웃과 나누던 따뜻한 마음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부근에는 또 다른 선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부경찰서 정문 옆 화단 안에는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한국설립 120주년을 맞아 첫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장소에 2007년 7월 22일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에 의하면 네 명의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들은 1888년 7월 22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순교의 땅’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제 올 한 해도 달력 한 장이 남아있다. 붉게 새겨진 25일. 예수의 복음이 전해진 그날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 예수의 사랑을 품고 조선 땅에 발 디딘 세 사람은 아직 그 자리에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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