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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같은 ‘고물’ 캐내던, 보물섬
보물 같은 ‘고물’ 캐내던, 보물섬
시대의 흐름 앞에 속절없이 밀려났지만, 중구 인현동 일대는 한때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다.
제물포고, 인천여고, 인일여고 등 학교가 몰려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하상가가 있어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동인천역 건너편, 일제강점기 양조장으로 사용하던 빨간 벽돌 건물 안팎으로 조성된 인현동 전자상가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 못지않은 명성을 누렸다. 전자기기나 부품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고,
과연 쓸 수 있을까 싶은 고물도 주인장의 손길 몇 번이면 ‘번쩍번쩍’ 근사한 새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상덕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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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헬리콥터도 만들 수 있다던 그들이었다. 그 ‘마이더스의 손’들이 하나둘 가게를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시간의 무게, 변화의 바람에 내몰려….
세운상가 부럽지 않던 ‘인현동 전자상가’
197080년대 서울에 미사일이나 잠수함도 만든다던 ‘세운상가’가 있었다면, 인천에는 소형 헬리콥터 정도는 거뜬했던 ‘인현동 전자상가’가 있었다. 한창때 30곳이 넘는 점포가 자리 잡고 있던 상가는 듬성듬성 빠져나가 이제 스무 곳 남짓으로 쪼그라들었다. 골목 곳곳에 셔터를 굳게 내린 텅 빈 가게에는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붙은 간판만이 애처롭게 달려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손님들이 기다렸는데, 이제는 파는 사람들만 남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당시 동인천은 인천의 메인이었고, 이 일대는 서울의 청계천 세운상가처럼 번성했어요. 인천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니까요.” 30여 년 전부터 인현동 전자상가를 지키고 있는 ‘화음상사’의 강현식(49)씨가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가 만든 카 오디오를 달기 위해 차 10여 대가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서는 건 일상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 깊숙이에서 만난 ‘동원전자’의 이지훈(59)씨도 이곳의 전성기를 말해준다. ‘뒤쪽’ 송현동에서 태어나, ‘앞쪽’ 인현동에서 장사하며 살아 온 그도 한때 달러를 벌어들일 만큼 호시절을 누렸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필리핀, 베트남, 러시아 등에서 많이들 찾아왔어요. 여기서 트럭 가득 물건을 싣고서는 인천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자기네 나라로 가는 거지. 이제, 다 지난 일이야.” 다시 좋은 날이 올 수 있을까, 가게 구석진 자리에는 멀리 바다 건너 온 손님들과 나눈 추억이 담긴 빛바랜 사진첩만이 먼지 속에 뒹굴고 있다.
“작동될지 모르겠네…” 80년대 만든 테이프를 넣는 카 오디오는, 주인장의 손길을 거친 후에도 결국 켜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옅게 번진다.
초등학교 담장 앞 좌판에서 꽃핀 역사
인현동 전자상가의 시작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자리인 축현초등학교 뒤편 담장 앞에는 3.3㎡(1평) 남짓한 구멍가게들이 줄느런히 이어져 있었다. 상인들은 좌판 위에 광석 라디오, 선풍기, 진공관 텔레비전, 온갖 부속품을 늘어놓고 팔았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고쳐 쓸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고물들이지만 늘 사람들로 들끓었다.]
“내 기억으로는 굉장했어요. 나도 수리 기술을 배우고 부속품을 사러 많이도 왔다 갔다 했지. 50대 내 또래 인천 사람들 중에 소싯적에 좀 놀았다면 용동 큰우물 주변에서 먹고 마셨을 것이고, 기술 배우는 사람들이나 공구가 필요한 사람들은 이쪽으로 몰려들었어요. 당시 인천에서 전자기기 파는 데라곤 여기밖에 없었으니까.” ‘신흥전자’의 진흥범 씨는 축현초교 담장 앞 좌판 상인들에게서 기술을 배워 가게 문을 열었고,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자기기와 부품은 죄다 내놓고 팔았던 좌판은 1970년대 후반 학교 앞에 큰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공중분해됐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계속 장사할 사람은 남아 옛 양조장 건물로 입성하면서 인현동 전자상가의 역사는 계속된다.
다시 오지 않을, 잘나가던 그 시절
“1980년대 초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90년대에 학교가 하나둘 터를 옮기고 사람들이 떠나면서 동네가 죽어버렸어요. 송림공구상가가 생기면서는 여기서 돈 좀 벌었다 하는 사람이 많이들 넘어갔고요. 그러다 큰불이 나면서 동네가 텅 비어버렸지.”
화려한 시대는 길지 않았다. 1989년 동양 최대 규모라는 인천산업유통센터에 이어 1994년 송림공구상가가 들어서면서 그림자가 지기 시작하더니, 1999년에 인현동의 한 노래방에서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면서 동네를 집어삼켜 버렸다. 여기에 재개발 소식까지 들리면서 인현동 전자상가는 그나마 지키던 불씨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다.
기약 없이 새 주인 기다리는, 텅 빈 가게
45년 전 좌판 장사부터 시작한 ‘대륙전자’의 김동원(77세) 할아버지는 인현동 전자상가의 산증인이다. 전자기술자라면, 아니 인천 토박이라면 모르는 이 없는 대륙전자에는 전자부품이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심지어 손님들을 빼앗아간 유통센터에서조차 부품을 구하러 온다. 하지만 저기,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먼지만 자욱이 쌓여가는 물건들 사이로 ‘점포임대’ 안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차마 떠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머물러 있던 할아버지도 이제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륙전자가 없어지면 큰일 나요. 꼭 새 사람이 와야 하는데. 인천에 기술자들도 그렇고 동네 사람들도 부품을 찾아 많이들 오는데…. 그뿐인가, 동네 사람들에게는 여기가 만남의 광장이나 다름없어. 여기가 없어지면 서로 얼굴들도 못 봐요”.
1970년대 초 길바닥에서 시작해 화려한 시절을 거쳐 영욕의 세월을 지나고 있는 인현동 전자상가. 대륙전자는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새로운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둡고 황량한 상가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인파가 넘치는 도시의 거리로 길을 나선다.
‘대륙전자’, ‘우주전자’… 80년대 ‘대륙’을 꿈꾸고 ‘우주’를 꿈꾸며, 이곳을 드나들던 공학도와 기술자들은 자신의 꿈을 이뤘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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