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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수필] 홍여문 斷想

2001-05-18 1999년 12월호
지난 9월, 내가 태어난 인천을 떠난 지 60년, 고국을 떠난 지 30년만에 고향을 찾아보았다. 동행해주신 형님들의 설명을 들어도 눈에 익은 곳이 하나도 없고, 월미도를 가봐도 월미도 같지가 않았다. 인천 독특한 바다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여기저기 다녀보는 중에 홍여문에 다다르니… 아 얼마나 반갑던지, 꿈에 보던 홍여문! 셋째 형님이 운전하는 차가 서서히 홍여문을 지나는 잠깐 동안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인다.
우리는 내가 다섯 살때 인천을 떠나 부평으로 이사했다. 그때는 꽤 멀리도 이사간다고 생각했다. 몇 해 후 1945년 초에, 여고 졸업반이던 누나가 폐결핵으로 홍여문에서 멀지 않은 이와이내과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얼마 안가서 나도 결핵성 늑막염이란 진단을 받고 학교를 못가게 되니 누나하고 한방에 입원하여 병간호 하시는 어머니와 셋이서 있게 되었다.

누나의 병세는 악화 일로. 봄철부터는 침대에서 내려 오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와이병원 입원 환자는 거의 다 결핵 환자였던 것 같다. 이삼일이 멀다하고 하나씩 흰 홑이불에 덮여 들것에 실려나갔고 바로 그 방에 어떤 때는 그날 오후에, 늦어도 다음 날에는 틀림없이 다른 환자가 새로 입원하곤 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긴 복도 끝에 있는 변소에 가는 일이었다. 병원은 우중충했고, 특히 양쪽으로 병실이 줄지어 있는 복도는 언제나 어두침침했다. 낮에도 나는 어머니더러 같이 가자고 떼를 썼고, 밤에는 아예 누나 변기를 썼다. 나는 병세가 점점 좋아져서 병원과 부평집을 왔다갔다 하다가 이른 봄에 완전히 퇴원했다.
늦은 봄 어느날, 어머니가 밑반찬을 가지러 집에 오셨다가 정기검진 받을 때가 된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서산마루가 붉게 물들었을 때쯤, 부평역에 나와서 경인선 하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이날 막차다. 거의 한시간을 기다려도 기차가 안오자, 어머니가 역 직원에게 물어보니 두시간 연착이란다.
이윽고 기차에 탔을때는 이미 사방이 깜깜했고 병핑계로 학교도 안가고 딱지치기 잣치기로 온종일 뛰던 선머슴은 앉자마자 어머니 무릎위에서 인사불성이 된 모양이다. "상인천이다, 내려야 한다."고 마구 흔드시는 바람에 눈은 떴는데 몸은 곤죽이다. 할 수 없이 한손에 두 보따리를 들고 나를 들쳐업으신다.
역사(驛舍) 밖에 나오니 쌀쌀한 밤바람이 한쪽 뺨에 느껴진다. 잠이 깨는 듯 하더니 따뜻한 어머니 등에서 또 깊은 잠이 들었나 보다. 나를 내려 놓으시면서 "얘야 이젠 더 못 업겠다." 기진 맥진 하신 음성이다. 당국의 등화관제(燈火管制) 명령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이 하나도 없고 깜깜 절벽이다.
내 한손을 끄시는 어머니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그 길이 홍여문으로 가는 오르막 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길에는 인기척이 하나도 없다. 자꾸 뒤 처지는 나를 끄시기에 힘이 드셨던지, "얘야, 빨리 가야지! 너의 누나가 방문도 못 잠그고 있을텐데." 조금 높아진 어머니 음성이다. 정신이 번쩍 난다. 낮에도 무섭던 병원 복도. 흰 홑이불에 덮여 나가는 들것….
이제는 어머니 곁에 바짝 붙어 걷는다. '오오, 누나 누나 금방 갈게'. 홍여문의 둥근 아치가 서해 밤하늘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홍여문을 들어서니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벽과 천장에 메아리쳐 울린다.
우리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홍여문을 나와서 내리막 길에서는 둘이 다 뛰고 있었다. 언제나 안잠긴 채 있는 병원 뒷문으로 들어가 층계를 더듬더듬 올라가서 "누나" 하면서 홱 잡아당겼으나 문은 꿈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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