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다시 쟈스민 향기는 짙어지고
중구 북성동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흔히 청관(淸館)이라고 불린다. 이는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인천에 중국인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1884년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을 체결하면서부터이다. 현재의 북성동 일대 구릉지 5,000평에 청국 조계(租界)를 설치하고 청국영사관이 문을 열며 자치지역을 형성해 나갔다. 그 동네의 이름은 양국의 친선을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선린동(善隣洞)이라고 불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될 때까지 화교의 수는 점점 늘어 3천 명에 이르고 거주지역은 경동 싸리재 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대륙에서 정변이 일어나고 산동지방에 소요가 일자 중국인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황해를 건너 인천으로 다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막노동꾼인 쿨리(苦力·coolie)들이 상당 수 끼어 있어 부두노동자로 생활했다.
이즈음에 탄생한 것이 자장면이다. 그들은 볶은 춘장(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먹었다. 그것이 오늘날 자장면의 기원이다.
‘비단 장수 왕서방’의 명성은 인천에서 먼저 꽃피워졌다. 동순태, 인합동, 동화창 등 중국거상들이 이곳에 능라주단, 한약재, 차, 도자기, 주전자 등 ‘신기한’ 물건들을 들여와 팔았다. 없는 게 없어 우스개 소리로 용의 발바닥까지 팔았다는 곳이 차이나타운이었다.
한동안 청관의 시계는 멈추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수가 한 때 1만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번창했으나 6·25 전쟁과 60년대의 각종 규제로 인해 중국인들의 ‘엑소더스’가 이어졌다. 퇴락한 부락으로 전락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즈음인 1992년에 한국과 중국이 다시 외교관계를 맺고 이후 이 일대는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이제 차이나타운은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차이나타운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중국풍물상가 등이 조성될 예정으로 이미 중국풍의 대문 패루(牌樓)와 공자상(孔子像)이 세워졌으며 붉은 색등(色燈)이 가게마다 내 걸리고 있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을 가장 차이나타운답게 만드는 것은 자장면도 아니요 패루도 아니다. 차이나타운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화교중산학교이다. 1902년 4월 우리나라 최초로 청나라 영사관 자리에 문을 연 인천화교학교는 개교 100년을 맞았다. 화교의 수가 줄어들면서 학교도 급격히 쇠락했지만 청국의 이민자들이 ‘코리아드림’을 꿈꾸며 짐을 부려놓은 지 한 세기를 넘긴 지금도 화교학교에서 ‘중국’을 배우는 그들의 아들과 딸들에 의해 가느직하나마 청관의 정체성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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