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대한제국을 우리 손으로 일으켜 세우자
2003-03-12 2003년 3월호
1898년 6월에 설립된 인천박문협회(仁川博文協會)를 통해서 우리는 인천의 활발한 교육열과 아울러 인천에서 일어난 근대계몽운동의 선구적 발자취를 확인하게 된다. 독립협회 운동의 영향 아래 1898년 6월 9일에 인천에서도 박문협회가 결성되었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의 <博學於文 約之以禮>이란 구절에서 차용하여 ‘博文’이란 이름을 붙인 박문협회는 서울의 독립협회를 지원하는 자매단체인 동시에 인천 지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인천박문협회는 그 동안 지역사의 연구에서 전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협회의 자매단체 중 가장 큰 규모와 활동을 자랑하는 협성회(協成會)(1896년 11월 30일 창립)에서 발행하는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는 1898년 6월 25일자 잡보란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 소식을 최초로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인천박문협회는 관보와 각처의 신문 및 시무상에 유익한 서책을 많이 구하여 놓고 모든 회원들이 날마다 모여 강론하고 연설하여 지식과 학문을 널리 알리고자 설립되었으며,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회원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협성회에서도 박문협회의 설립과 그간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인천항 동포들에게 유익한 사업을 많이 하기를 바란다고 크게 옹호하였다.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898년 6월 28일자에는 인천박문협회 회원 한우근(韓禹根)의 연설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당시 인천항 경무서의 총순이었던 한우근은 이 연설에서 모임을 뜻하는 ‘회(會)’자의 한자 뜻풀이로 연설을 시작하여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박문협회도 단결하여 “우리 대한국회를 보존야 남의 나라에 압졔를 밧지 말고 명 쥬 독립국이 되”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 1898년 7월 4일과 6일에 실린 [박문 협회 회원의 연설]이라는 논설을 통해서도 박문협회가 목적한 바는 분명히 확인된다. 외세의 침탈 아래 놓여 있는 대한제국을 일으켜 세우는 애국 자강운동 노선이 바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 취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문협회의 조직은 어떠하였으며 그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을까? 『협성회회보』 1898년 7월 2일자 잡보란에는 박문협회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3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박문협회가 매주 일요일에 개최하였던 통상회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국기를 연설회장의 앞뒤에 각각 쌍으로 배치하고 국가와 국왕에 대한 일련의 의례를 행한 후 거행된 박문협회의 이 통상회(通常會)는 방청객까지 포함하여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열기로 자못 뜨거웠다.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박문협회의 자강운동은 자연스럽게 교육계몽 사업으로 이어졌다. 매주 통상회를 개최하는 한편으로 박문협회는 주요 사업으로 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다. 협회 창설 한 달 여만에 회관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야간 영어학교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협회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매일 저녁 7시에 영어를 가르치는 야간학교로 출발한 이 학교는, 보통 교육을 실시하는 초급 학교라기보다는 지역 사회를 이끌어 나갈 학식 있는 지식인을 길러내기 위한 외국어학교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인천박문협회의 회관을 학교로 삼아 회장이 곧 교장이고 교사도 회원인 박문협회 내의 서클과 같은 성격의 학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천박문협회에서 설립한 이 사립 영어학교는 1900년에 설립된 인천항사립박문학교의 모태였다.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했던 강준은 후일 인천항 사립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오늘날 박문초등학교의 학교 명칭은 바로 독립협회의 자매단체로 활동하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 자랑스러운 이름인 것이다.
1898년 10월 15일자로 인천박문협회가 독립협회의 인천항지회로 정식 인가되었다. 여기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숨은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립협회 중앙본회의 회원으로 사법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박문협회의 설립을 보증하고 아들 강준과 함께
독립협회의 자매단체 중 가장 큰 규모와 활동을 자랑하는 협성회(協成會)(1896년 11월 30일 창립)에서 발행하는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는 1898년 6월 25일자 잡보란에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 소식을 최초로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인천박문협회는 관보와 각처의 신문 및 시무상에 유익한 서책을 많이 구하여 놓고 모든 회원들이 날마다 모여 강론하고 연설하여 지식과 학문을 널리 알리고자 설립되었으며,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회원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협성회에서도 박문협회의 설립과 그간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인천항 동포들에게 유익한 사업을 많이 하기를 바란다고 크게 옹호하였다.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898년 6월 28일자에는 인천박문협회 회원 한우근(韓禹根)의 연설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당시 인천항 경무서의 총순이었던 한우근은 이 연설에서 모임을 뜻하는 ‘회(會)’자의 한자 뜻풀이로 연설을 시작하여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박문협회도 단결하여 “우리 대한국회를 보존야 남의 나라에 압졔를 밧지 말고 명 쥬 독립국이 되”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 1898년 7월 4일과 6일에 실린 [박문 협회 회원의 연설]이라는 논설을 통해서도 박문협회가 목적한 바는 분명히 확인된다. 외세의 침탈 아래 놓여 있는 대한제국을 일으켜 세우는 애국 자강운동 노선이 바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 취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문협회의 조직은 어떠하였으며 그 구성원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을까? 『협성회회보』 1898년 7월 2일자 잡보란에는 박문협회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3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박문협회가 매주 일요일에 개최하였던 통상회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국기를 연설회장의 앞뒤에 각각 쌍으로 배치하고 국가와 국왕에 대한 일련의 의례를 행한 후 거행된 박문협회의 이 통상회(通常會)는 방청객까지 포함하여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열기로 자못 뜨거웠다.
문명개화를 지향하는 박문협회의 자강운동은 자연스럽게 교육계몽 사업으로 이어졌다. 매주 통상회를 개최하는 한편으로 박문협회는 주요 사업으로 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다. 협회 창설 한 달 여만에 회관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야간 영어학교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협회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매일 저녁 7시에 영어를 가르치는 야간학교로 출발한 이 학교는, 보통 교육을 실시하는 초급 학교라기보다는 지역 사회를 이끌어 나갈 학식 있는 지식인을 길러내기 위한 외국어학교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인천박문협회의 회관을 학교로 삼아 회장이 곧 교장이고 교사도 회원인 박문협회 내의 서클과 같은 성격의 학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천박문협회에서 설립한 이 사립 영어학교는 1900년에 설립된 인천항사립박문학교의 모태였다.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했던 강준은 후일 인천항 사립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오늘날 박문초등학교의 학교 명칭은 바로 독립협회의 자매단체로 활동하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 자랑스러운 이름인 것이다.
1898년 10월 15일자로 인천박문협회가 독립협회의 인천항지회로 정식 인가되었다. 여기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을 주도한 숨은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립협회 중앙본회의 회원으로 사법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박문협회의 설립을 보증하고 아들 강준과 함께
- 첨부파일
-
- 다음글
- 환경관련기술 어디까지 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