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염양(炎陽) 아래 인천은 사람사태’
주5일제 근무가 확산되면서 우리네 도시인들의 여가생활도 날로 분주해 지고 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도시생활이 빡빡하더라도 연휴와 주말을 만나면 도시를 떠나 어디로든지 차를 몰고 떠나는 행락객들이 전국의 도로들을 가득 메운다. 봄철엔 꽃을 찾아, 여름엔 더위를 피해, 가을엔 단풍 숲으로, 겨울엔 설국의 나라를 찾아서. 급격한 공업화와 개발 탓으로 ‘가볼만한 곳이 없다’는 푸념이 늘 따라다니는 오늘의 인천이언만, 예전엔 오히려 인천으로 인천으로, 삶에 지친 행락객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아들었다.
본사 주최 인천 월미도 납량열차
- 8월 1일부터 5일간 운전
월미도! 맑은 물 넘치고 시원한 바람 불며 해수욕의 청신한 놀이와 바다의 원대한 풍경을 한자리에서 호흡할 수 있는 월미도! 더위에 찌드는 가족을 이끌고 갈 곳을 모르는 시민들이여! 가장 약소한 비용으로 여름의 하루를 어디로 가서 시원히 노시겠는가! 갈곳 없는 시민 모두의 편의를 돌보아 이제 본사에서는 경성에서 한 시간이면 능히 도달할 수 있는 인천 월미도의 승지를 택하여 철도와 인천부청의 만공의 원조를 힘입어 이에 8월 1일부터 닷새 동안 경성의 시민을 위해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춰 임시열차를 하루에 두 번씩 운전하게 되었으니 많이 이용하여 주소서.
『매일신보』 1926. 7. 25.
1920년대 들어 그 아름다운 풍광이 주목을 받으면서 대규모의 유원지로 개발된 월미도는 인천의 명승지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명승지 중 하나였다. 일제 식민통치를 교묘히 합리화하기 위한 문화적 책략이 월미도 유원지 개발의 숨은 의도 중 하나였음은 물론이겠다.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도한 월미도 납량열차 운행 이벤트에도 그러한 식민통치의 논리가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월미도가 가진 뛰어난 풍치는 잘살건 못살건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청량한 생의 위안을 가져다 주었을 터이다.
하루 두 차례 아침과 점심 시간에 경성을 출발해 단 5일 동안만 운행하려던 월미도 납량열차는 짓궂은 장마 탓으로 8월 16일에야 운행되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치에 더하여 해수욕장과 녹원, 조탕과 유흥장, 거기에 호텔시설과 조개줍기, 연화대회, 보물찾기, 기생 공연 같은 각종 이벤트가 곁들여지니, 월미도의 여름 한낮과 밤의 서정을 즐기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여름을 아쉬워하며 납량열차에 몰려들었을 것이다. 8월 16일부터 3일간 개최된 납량열차 운행과 월미도 유원지소식을 『매일신보』는 자사 홍보를 곁들이면서 3일간 매 지면을 통해 크게 보도하였다.
송도로 월미도로, 일일 승강(昇降) 만육천여명
- 염양(炎陽) 아래 인천은 사람사태
1백도를 넘나드는 작금 살인적 혹서로 말미암아 마비된 도시인의 신경으로서는 하로의 위안과 더위를 잊고저 그리운 바다를 찾아 발꿈치는 움직이고 있다. 따라 해도(海都) 인천에는 작금 상승하는 수은주(水銀柱)와 정비례로 폭주하는 척서객(擲暑客)으로 사람의 사태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작일은 일요인지라 경성을 위시 근방에서 쇄도하는 피서객으로 명승 월미도와 송도유원에는 문자 그대로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제 도대체 얼마마한 인천이 동원되었을까? 인천의 현관 상인천(上仁川) 인천(仁川) 인천항역(仁川港驛) 등 3역의 승강객 수효를 살펴보기로 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 이상 누계 : 강차인원 8,115명, 승차인원 8,256명, 총계 16,371명
이상 표와 같이 16,000여명이 동원되는 터에 제아무리 무쇠로 만든 20세기 문명의 첨단병 철마(鐵馬)라 하나 사람 운반에 가쁜 숨을 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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