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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사라지는 문화재, 흔들리는 역사의 기억

2003-06-10 2003년 6월호


지난달 15일에 국립공주박물관에 강도가 들어 국보 247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을 포함한 국보급 문화재 4점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언론에서는 국립박물관의 허술한 보안 상태에 대하여 크게 보도하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이번의 공주국립박물관 문화재 도난사건은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다. 해마다 소리소문 없이 수많은 문화재들이 약탈자들에 의해 수모를 겪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파괴되고 있다. 눈앞의 이익과 편리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이기심과 무관심 속에서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헐리고야 말게 된 화폐사상의 이채인 인천전환국
- 조선문화사상 기념이 될 38년전의 건축물

인천 용강정(龍岡町)에 있는 인천공립고등여학교의 구교사는 신교사의 낙성과 동시에 재작 30일에 심견모(深見某)에게 삼천오백여원에 낙찰되어 근근에 철폐키로 되았는 바 지난날 회고하면 이 건물이야말로 실로 조선문화사에 면치 못할 호조(好調)의 기념적 건물인줄을 아는 동시에 동 건물의 손명(損命)은 가석한 바이라 위(謂)하겠다. 즉 거금 38년전(1888)에 한국정부에서는 민비암살음모사건으로 사형에 처한바 된 신사(紳士)이든 안동수와 대삼륜장 병위 등의 원조를 이용하야 인천 전동에 전환국(주전소)를 설치하야 (…중략…) 각국 정부 대표관의 항의가 백출하야 부득이 광무5년(1901)에 비로소 전기(前記) 전환국의 폐철(廢徹)을 명하앗다는데 조선의 화폐사상에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한 건물이 철훼의 운명에 이르렀다 함이다. 매일신보, 1926. 7. 3.

 

식민지 치하였던 1926년에 보도된 위의 인천전환국 철폐 예고기사는 문화재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천전환국은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침탈에 직면했던 구한말 조선 정부에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자 화폐 주조에 들어가는 연료의 조달이 쉬운 인천에 1892년에 설치하였다. 인천전환국의 청사는 3동으로서 凹형을 이루었는데, 이곳에서는 은화와 함께 보조화인 백동화를 주조하였다. 그러나 주조비가 적게 들어 이익이 큰 백동화(白銅貨)를 남발함으로써 물가에 큰 변동을 가져오는 폐단이 나타나고 각국 정부와 기관에서 항의가 들어옴에 따라 인천전환국은 1900년 그 역할을 다하였다.
인천전환국 청사는 그 후에 인천고등여학교(현재의 인천여고) 교사를 활용되다가 12926년에 신교사를 신축한 후 일본인에게 낙찰되어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인천전환국 터에 자리잡았던 인천여고도 새로 교사를 짓고 연수구로 이전함으로써 이제는 전환국 자리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국보 강화종각, 가꾸는 사람 없어 도괴에 직면
 - 佛兵의 손에서 도난도 될 뻔해

강화의 명물인 종각의 동종은 지금으로부터 230여 년 전 숙종조 때 강도유수 윤지완(尹趾完, 1635∼1718)의 소작으로 당시 남문에 달아두고 주민에게 때를 알려주는 활약을 해오다가 그 후 일종의 고적(古蹟)으로 내려오던 것을 소화7년(1932) 3월에 국보로 지정되어 고적유물에 등록된 것인바 오랜 시일에 풍마우세로 지금은 주추가 물러나고 기둥은 모두 퉁겨 어느 날 도괴될지 모를 만큼 위험에 빠져있는 바 불행히 이것이 무너지면 부근 인가에까지 위험하리라 하여 고적 보존상 또는 시가 미화상 빨리 그 수축을 바라마지 않는 중에 신축 후 이태왕(李太王) 시대에 일차의 개축이 있었을 뿐으로 그 후 손을 대지 않아 도괴에 직면한 것이다. 동종은 병인양요 당시 불병(佛兵)들은 이것을 자기 본국에 가지고 가려고 서문의 토교(兎橋)까지 옮겨갔으나 원체 중량이 6,500근이라서 가져갈 수 없으므로 버리고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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