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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대홍수 후 괴질 찾아들다

2003-07-28 2003년 8월호

 

올해의 장마전선은 남부지방에 머물면서 그곳에 많은 비를 내렸다. 장마가 끝나면 한반도에 크고 작은 태풍이 몰려와서 수해와 더불어 집을 잃은 이재민을 남기는 것이 여름철의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아무리 첨단과학이 발달하여도 자연의 변화무쌍한 변화와 수반되는 천재지변은 어쩌지 못하는 형국이다. 특히나 1980년대 이후로 인간의 욕심이 초래한 환경파괴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전 지구촌 사회가 온갖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이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1925년 을축년 여름, 대홍수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2개월 동안 4차례의 홍수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208,000정보의 농경지가 유실되었으며, 무려 6만여 동의 가옥이 침수를 당했다. 이 기간 중 최대 강수량은 하루 370mm였으며 517명의 인명피해와 1,366억 원의 재산피해를 냈다.(을축년 대홍수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필우 감독은 그해 9월에 동명의 타이틀로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서울시내 전역이 거의 다 물에 잠겼던 을축년 대홍수에 인천 지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인천 송현리, 홍수로 각각(刻刻) 위험
- 이 비가 계속하면 세 동리가 전멸

연일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인천시 주민은 공연히 불안을 느껴오는 중 송현리(松峴里) 화평리(花平里) 금곡리(金谷里) 일대에는 금 10일 정오경부터 거친 물결이 일기 시작하야 세 동리가 갑자기 물난리를 이루고 말았는데, 이제 이와 같이된 원인을 조사한즉 그는 송현리 매립공사로 인하야 빗물이 흘러나갈 길이 없어 자꾸 동리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까닭이라 하며, 물에 잠긴 집은 마루와 방은 물론 지붕까지 잠긴 집이 있어 방금 주민 일동은 공포에 싸여 어쩔 줄을 모르고 부르짖는 중인바 만일 이 비가 밤까지 계속 한다 하면 저녁 밀물(潮水)과 함께 더욱 흉흉하여져서 전기 세 동리는 전멸을 당할 위태한 운명에 잠겼으므로 새삼스러히 인천시민은 매립공사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는 중이더라. (십일 오후 세시 사십분 지급전화)      『조선일보』 1925. 7. 11.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인천지역에는 특히 바닷물이 들고나는 갯고랑이 많아서 일찍부터 매립공사가 시작되었다. 위의 신문기사는 그런 매립공사의 와중에 더 큰 수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송현동 매립지 일대의 홍수 피해를 보도하고 있다. 자연의 재해에 더하여 인간이 초래한 인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피해였던 것이다. 이때의 대홍수는 부평평야와 강화도 일대에도 큰 피해를 남기고 지나갔다. 전기시설의 침수로 인해 인천시내 전체가 암흑의 도시로 변하고, 가난한 서민들의 집을 잃고 유랑해야 했던 눈물나는 이야기가 그해 을축년 여름 신문지상에 넘쳐났다. 
광포한 홍수의 상처가 지나가자 이번에는 역병이 찾아들어 서민들의 삶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위생 상태가 지금보다도 훨씬 열악했던 당시에는 해매다 호열자(虎列刺, 콜레라)를 비롯한 온갖 전염병이 해마다 많은 인명을 앗아갔던 것이다.

 

호역(虎疫) 예방주사
- 인천에서 일제히 시행

상해(上海) 방면에 호열자가 점점 만연되는 형세임으로 그곳과 관계가 밀접한 인천은 극히 경계중이라 함은 누보(屢報)한 바이어니와 재작 14일에는 대삼(大森) 인천서장이 각계 주임 이하 수상서원(水上署員) 공의(公醫)급 인천부청 방역위원과 함께 타협한 후 오는 17일로 20일까지 나흘 동안은 세관(稅關) 구내에서 종업하는 일반주민 급관계 관리들에게 21일부터 28일까지는 일반 부민들에게 일제 호열자 예방주사를 시행하기로 되었다는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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