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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친목과 지식의 교환 주도
인천에 한용단, 일반 청년의 화목과 운동의 장려도모
인천으로부터 경성시내 각 학교에 통학하고 있는 조선학생 수십여명의 발기로써 한용단(漢勇團)이라 하는 일종의 구락부를 조직해 가지고 인천에 있는 일반 청년들의 친목과 지식의 교환, 운동의 장려를 도모한다 하는데, 그 단은 작년 봄에 세워 차츰차츰 확장을 해나가던 바 그 당시에 만세소요로 인하여 중요한 임원들은 모두 철창 아래에서 신음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몇 사람들이 뒤를 이어 내려오다가 지금은 그 단의 회원은 칠팔십명에 달하였으며, 운동은 야구, 정구, 축구 등이 있고 문예부에는 도서 같은 것도 갖추어 놓고 단원이 수의로 열람케 한다 하는데, 인천유지들은 청년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 각각 기부들도 많이 한다고 한다. 매일신보, 1920. 6. 15.
3·1운동 후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뿐만이 아니라 각종 문화운동과 계급운동, 청·소년운동과 여성운동 등이 인천에서도 분출하기 시작했다.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20년 6월 15일자에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인천한용단은 인천의 대표적 청년운동 단체였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한용단이 결성된 것은 3·1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1919년 봄이다. 『매일신보』 1919년 11월 13일자에 따르면 인천 내리(內里)의 젊은 청년들 30여 명이 야구와 축구를 하기 위한 운동단체로 조직하였다고 단순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기사를 통해 보건대 인천한용단이 단순한 친목 운동단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으니, 한용단을 결성한 중요 임원들은 3·1만세운동에 깊이 참여한 까닭에 이미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이들의 뜻을 이어 외연을 확장해간 한용단의 지향은 단순한 친목 체육단체가 아니라 강렬한 청년운동단체를 지향하고 있었다.
1910년대 후반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는 인천지역의 본격적인 청년운동단체의 효시인 인천한용단의 모태였다. 당시 인천에는 조선인 학생이 주로 다니는 3개의 공·사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을 수용할만한 중학교가 실업학교인 인천상업학교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경성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당시 양정고보를 다녔던 고일(高逸)은 그의 책 『인천석금』에서 “한용단의 어머니격인 친목회는 인천의 문학청년을 아들로 탄생했으니 운동 경기를 외피(外皮)로 한 그 핵심은 민족해방정신을 내포(內包)한 문학운동으로 전개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용단보다 앞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계통의 인천남·녀엡윗청년회도 본격적인 청년문화운동을 뛰어들고, 한용단의 뒤를 이어 인배회(仁培會, 인천의 배재고보출신 청년모임), 제물포청년회, 인천무산청년동맹, 인천화평청년단, 인천여자청년동맹, 인천청년회, 인천청년연맹 등 무수한 청년단체들이 연이어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청년운동이 분출한다. 강화엡윗청년회, 강화중앙청년회 등을 위시한 강화 지역의 청년운동도 인천지역에 못지 않게 활발하였으며 영종, 옹진 지역에서도 독자적 청년운동단체가 출현하였다.
전 인천야구 결승 중지
전인천 춘기야구대회의 1, 2회전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제3회전과 결승전은 예정대로 오는 21일 상오 9부터 시작된 바 정각 전부터 앞을 다투어 모여든 관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 하오 4시 반부터 한용군의 선공으로 결승전이 시작되니 장내를 뒤집는 듯한 박수 소리와 한용군의 여용여호한 용기는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을 듯한 기세로 대전할 때 일본인 루심의 왕왕 부정당한 심판에 일반 관중은 분개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자주 일어 (......) 감정이 격앙되었던 일반 관중은 장내로 모여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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