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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나의 시네마 파라다이스

2017-06-12 2017년 6월호


나의 시네마 파라다이스



우리 집은 자유공원 기슭 해안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영화포스터를 양손에 가득 든 사람이 찾아와 식당 벽에 포스터를 붙여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된다고 하니 페인트 붓에 풀을 듬뿍 묻혀 포스터 뒷장에 쓱쓱 발라 벽에 척 붙였다. 그러고는 극장표 두 장을 건넸다. ‘나의 시네마 파라다이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천에는 극장이 무척이나 많았다. 집 근처부터 시작하면 시민관, 동방, 키네마, 애관, 인형, 오성, 문화, 도원, 미림, 자유, 세계, 장안극장 등 거의 동네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였다. 당시 영화는 ‘미성년자관람가’와 ‘미성년자관람불가’로 분류되었다. ‘미성년자관람불가’가 표시된 나무판은 무척 두꺼웠고, 글자는 빨간색이었다. 절대 보아선 안 된다는 강한 경고였다. 물론 나는 영화를 무척 좋아해 ‘관람불가’도 마구 보러 다녔다. 입장하는 어른들 곁에 바짝 붙어 들어가면 그 집 아이인줄 알고 그냥 들여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모님이 매번 바뀌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검표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어른에게 “댁의 아이인가요?”하고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과 동시에 거센 발길질이 되돌아왔고, 나는 극장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크게 다쳤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혼날까봐 장난치다 다쳤다며 거짓말을 했다. 그 이후로는 절대 어른 손을 잡고 극장에 가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 영화란 영화는 다 본 것 같다. 외국영화는 주로 동방과 키네마에서 상영했는데, ‘벤허’, 십계’, ‘닥터 지바고’, ‘러브 스토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드라큘라’, ‘혹성탈출’, ‘타임머신’, ‘외팔이’가 생각난다. 한국영화는 애관극장과 인형극장에서 주로 상영했으며 ‘두만강아 잘 있거라, 불가사리, 월하의 공동묘지, 미워도 다시 한 번, 저 하늘에도 슬픔이, 지옥문, 장화홍련, 카인의 후예,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이 떠오른다. 특히 ‘별들의 고향’은 정학 맞을 각오를 하고 본 영화였다. 그것도 고3이 교복을 입은 채로 말이다. 그 영화는 ‘절대’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자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나 싶다.
나는 지금도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닌다. 그때 생긴 버릇이다. 영화 보는 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나만의 시간이다. 얼마 전에도 ‘에이리언’을 혼자 보고 왔다. 나이 먹은 어른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도 극장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래된 두근거림이다. 예전 극장표에는 일련번호가 적혀 있었고, 영화 제목은 고무 스탬프로 찍혀 있었다. 극장표를 손에 쥔 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극장표는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당시 무거운 극장 출입문을 밀면 두꺼운 검은 커튼이 나왔고, 그것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면 스크린에 영화가 돌아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딴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유다 벤허가 되어 전차를 몰기도 하고, 모세가 되어 홍해를 가르기도 했다. 닥터 지바고가 되어 라라를 찾아 헤매었고, 올리버가 되어 제니퍼와 눈싸움을 했다. 또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에게 총을 쏘기도, 가난한 윤복이가 되어 껌을 팔기도, 불가사리가 되어 쇠붙이를 먹어치우기도 하고, 화가 문호가 되어 경아와 함께 자리에 누워보기도 했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시민관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관람을 끝내고 극장 안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이겼다. 나는 도망가 숨어야 했다. 복도에 뒤집어 세워놓은 영화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난 그만 ‘악!’ 소리를 질렀다. 드라큘라 백작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얼마나 무섭고 놀랐는지 그 후로 빨간색은 공포의 색으로 각인되어 그 색만 보면 그때와 비슷한 공포를 느낀다. 새빨간 교회의 십자가와 새빨간 넥타이를 보아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모든 드라큘라 영화는 다 보았다. 마지막으로 ‘3D 드라큘라’만 남았다.
지금 영화관들은 멀티플랙스 시설에 3D 영상과 음향, 대형 스크린과 안락한 의자로 첨단화 되어 있다. 그래도 나는 비가 내리던 은막이 그립고, 더빙 배우들의 목소리가 그립고, 두꺼운 검은 커튼이 그립고, 붉은 등의 임검석이 그립고, 껌을 팔던 소녀가 그립고,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그립다. 인천은 나에겐 영원한 시네마천국이다.

내 가슴에 새긴 한 구절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부처님 말씀이다.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용기 내어 홀로 가라고 들려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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