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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깊다, 냉면 한 그릇

2017-08-01 2017년 8월호



 
깊다, 냉면 한 그릇


후루룩 맛있게 한 그릇 들이켜고 끝낼 일이 아니다.
인천에는 60여 년 분단의 역사와 맞닿은 평양냉면이 있고,
산업화 시대 노동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던 세숫대야냉면이 있다.
깊고, 담담하면서도 풍성하다.
대한민국 격동의 역사가 진하게 녹아 있는 냉면 한 그릇.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경인면옥'의 정갈한 평양냉면 한 그릇



북에서 섬, 육지로 온 '한 그릇’

인천은 깊다. 도시 곳곳에 한민족이 걸었던 굴곡의 세월이 묵묵히 배어 있다. 6·25전쟁 때도 인천은 대한민국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다. 땅이 두 동강이 나면서 인천에 남은 이북 사람들 중에는 황해도가 고향인 사람이 많았다. 북녘 땅에서 즐겨 먹던 음식인 냉면도 함께 흘러들어 왔다.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에는 황해도식 막국수인 메밀냉면이 널리 퍼져 있다. 백령도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해 예부터 메밀 농사를 많이 지었다. 섬사람들은 그 메밀을 통째로 갈아서 반죽해 면을 만들고 까나리 액젓으로 풍미를 더해, 이북식 전통에 섬 고유의 맛을 더한 냉면을 탄생시켰다.

“황해도의 맛이에요. 어릴 때 먹고 자란 바로 그 맛.” 닿을 수 없는 땅을 그리워하는 이는, 냉면 한 젓가락에 눈물을 왈칵 쏟아내기도 한다. 백령도에 있는 ‘사곶냉면’은 멀리 육지에서도 찾는 소문난 맛 집이다. 섬 토박이 김옥순(65) 할머니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손맛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돼지 뼈를 푹 우려낸 육수에 메밀 면을 말아 낸 단출한 한 그릇.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담백하면서도 맛이 깊다.

주안에 있는 ‘변가네 옹진냉면’도 백령도 출신이다. 섬이 고향인 변신묵(81) 할아버지는 1977년 육지로 와 40여 년째 냉면을 말고 있다. “나 어릴 때 백령도에서는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다들 냉면을 해 먹었어. 냉면이라면 집집마다 다 한 솜씨 했지.” 곡물은 갓 갈거나 도정했을 때 최고의 맛을 낸다. 이 집 냉면은 메밀을 그때그때 빻아서 손수 반죽해 면을 뽑아 메밀 향이 진하다. 부드러운 메밀 면과 구수한 육수가 어우러져 입안 가득 번진다. 백령도 뜨거운 여름 한낮, 평상에 걸터앉아 후루룩 마시던 냉면이 이 맛이었으리라.





이북식 전통에 섬 고유의 맛을 더한 백령도 ‘사곶냉면’





소고기 설깃살을 6시간 이상 우려낸 육수와 직접 뽑은 면이 '경인면옥' 맛의 비결


 
질곡의 역사 담담히 품은 ‘한그릇’

60여 년 분단의 역사를 지나온 냉면집이 또 있다. 70여 년 전통의 평양냉면집인 ‘경인면옥’이다. 평안도가 고향인 고 임금옥 할머니는 광복을 앞둔 1944년에 서울 종로로 내려와 냉면집을 하다 인천으로 터를 넓혔다. 당시 가장 번화한 중구 신포동에 자리를 잡았는데, 서울과는 달리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다소 슴슴한 육수 맛이 인천 사람 입맛에 생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6·25전쟁이 끝나고 이북 사람이 몰려들면서 냉면집은 북새통을 이뤘다.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냉면집에서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이다.

경인면옥은 현재 손자 함종욱(49) 씨가 대를 이어가고 있다. 함께 식당을 꾸리던 아버지 함원봉(72) 씨는 지난해에야 아들에게 육수 만드는 비법을 전수했다. “우리는 순수하게 소고기만 써. 일절 다른 것을 첨가하지 말라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늘 강조하셨지.” 소고기 설깃살을 6시간 이상 우려낸 육수는 깊으면서도 맑고 고요하다. 그 맛의 묘미를 모르고 “맹물을 무슨 맛으로 먹느냐.”며 화를 내는 손님도 더러 있다. 하지만 가게 한편에 걸린 문구처럼 ‘정말 좋은 것은 반드시 담백한 것’이 아니던가.

“저희 집 손님들은 ‘처음엔 긴가민가하고, 두 번째는 맛을 알고, 세 번째 먹으면 육수의 참맛을 안다’고들 하세요.” 평안도에서 인천으로 삼대째 이어온 손맛은, 갸웃하다가도 한번 맛 들면 자기 전에도 번뜩 생각나 다음 날 찾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화평동 세숫대아냉면의 시초인
‘아저씨 냉면’의 역사를 잇고 있는 아들.
원래 학교 체육선생님이었다.






세상에 없던 단 ‘한그릇’
 

6·25전쟁이 끝나고 인천의 공장들이 산업화 시대를 이끌어가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동자들에게 국수는 부담 없이 허기를 채우는 한 끼 식사로 딱이었다. 귀한 소고기로 육수를 낼 수 없으니 갖가지 재료에 고추장 양념으로 맛을 내고, 세숫대야처럼 생긴 큰 그릇에 푸짐하게 담아냈다. 인천 출신 화평동 ‘세숫대야냉면’은 그렇게 태어났다.

화평동 냉면 거리는 1980년대 초반 인근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상인들이 하나둘 모여 생겨났다. 구두를 만들던 김 씨, 양복을 짓던 박 씨, 포장마차를 하던 선미네가 만나 자연스레 골목을 이뤘다. ‘아저씨 냉면’의 김용만(66) 씨는 이 일대에서 가장 먼저 냉면을 팔았다고 자신 있게 간판을 내걸었다. “경인면옥이 4천500원에 냉면을 팔 때 500원으로 장사를 시작했어요.” 인근 공장과 인천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입은 채로 냉면집으로 몰려들었다. 한창때는 새벽 동틀 무렵부터 가게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우리 가게에서 줄 서다 보면 이산가족도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허허.”

전성기는 끝이 났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북적이던 냉면집은 반으로 줄어 이제 10여 곳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마저도 곧 불어닥칠 재개발 바람 앞에 위태롭게 놓여 있다. “모든 게 영원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이 골목도 곧 사라질 거예요.” 호기롭게 세숫대야냉면의 역사를 시작한 청년은 ‘아저씨’에서 어느덧 할아버지가 됐다. 세상에 없던 냉면이, 세상에서 없어질 날이 머지않은 걸까. 부디 그 안타까운 예감이 어긋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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