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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는시간은 없다
그냥 가는시간은 없다
무대가 좋아 무작정 시작한 연극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외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무대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무대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신명나게 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무대 위의 그는 늘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 그가 인천 연극 역사 최초로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연극이, 인생에서 가장 옳은 길이었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글 김윤경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 ‘워낭을 찾는 사람들’
“쟁쟁한 선배님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에 수상에 대한 기대나 예상은 전혀 못했습니다.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구요. 수상소식을 전화로 아내한테 전했는데, 아내도 많이 울었습니다.”
지난 6월 4일 대구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인천의 연극배우 이병철(45) 씨. 극단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활동 중인 그는 이번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선보인 작품 ‘워낭을 찾는 사람들’을 연기하는 내내 아버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워낭을 찾는 사람들’은 구제역으로 피해 받는 농민과 소, 돼지의 살처분을 맡고 있는 공무원의 애환을 담은 작품. 그는 극중에서 싸움소를 키우고 있는 기수 역을 맡았는데, 가장 친한 친구 용우가 소를 강제로 죽이는 방역본부에서 일하는 바람에 내·외적으로 갈등과 고뇌를 겪는 인물로 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극중 용우 아버지도 가족처럼 키우던 소를 살처분으로 잃고, 그 일로 죽음에 이르게 돼 갈등이 고조됩니다. 저희 아버지도 제가 어릴 적에 꽤 많은 돼지를 키우고 계셨는데, 돼지 콜레라로 돼지를 모두 강제 살처분당하고, 그 충격으로 제가 14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연기하는 내내 그런 아버지가 생각나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 분노에 차 낫을 들고 방역본부에 쳐들어가려는 장면에서 기수를 말리는 용우 때문에 주저앉은 그와 관객들은 모두 함께 울었다.
가족의 반대에도 시작한 연극
“연극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무대에 서 있는 배우가 정말 멋있어 보였거든요.” 3남 2녀 중 막내였던 그가 스물이 되던 해 돌연 연극을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극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매형이 극단 ‘공감’의 정주희 씨를 소개시켜줬다. “매형이 정주희 선생님의 동생이었어요. 저의 연극을 지지해준 게 아니라, ‘연극바닥이 얼마나 힘든지, 너 어디 고생 한 번 해봐라’하고 소개해준 거였습니다.”
1994년, 그렇게 그는 극단 ‘공감’에서 배우이자 은사인 정주희 씨를 만나 10년간 연기를 배웠다. ‘한두 번 하고 말겠지’라고 생각한 정주희 씨도 지독한 생활을 버텨내는 그를 보고 “독한 녀석이 연극판에 들어왔다.”며 본격적으로 연기지도를 해줬다.
“길고 험난한 마라톤 레이스 같은 연극을 감당할 수 있으면 시작해라.
하지만, 완주할 자신이 없다면 관객으로서 박수를 많이 쳐달라고
후배들에게 말합니다. 열악한 연극 환경에 금세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 처음부터 후배들에게 마음을 다 주지는 못하겠더라구요.”
하지만, 연극인의 길은 너무나 외롭고 힘들었다. 가족들의 반대도 여전히 거셌다. 닭 도매업을 했던 큰형이 IMF로 사업이 망해 세상을 뜨고, 어머니마저 대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상황에도 오로지 연극연습에 열심이었으니 가족들의 반대는 당연했던 일. “밤에는 어머니 간병을 하고, 낮엔 내내 연극연습만 했으니 제가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작은형은 집안이 이런데 계속 연극할 거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막내인 저의 길을 묵묵히 응원해주셨습니다.”
아내와 딸의 응원이 가장 큰 힘
연극에 ‘미친’ 그도 잠시 흔들렸던 적이 있었다.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물질적으로 궁핍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도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워낭을 찾는 사람들’에서 용우 역을 맡았던 손인찬 씨. “외로운 길, 함께 가자.”라는 말에 다시 용기를 냈다. 연극연습이 없는 시간엔 노점을 하고, 방송국 단역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지난 2010년 인천연극제 신인연기상 수상을 시작으로 여러 단편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와의 연애시절엔 근사한 레스토랑 대신 동료들의 연극을 공짜로 보는 것으로 데이트를 대신했다. 42세에 결혼한 그는 아내와 조그만 통닭집을 운영하면서 예쁜 딸을 키우는 가장이 되었다. “딸이 지금 다섯 살인데, 연극연습에 종종 따라나섭니다. 연습 들어가면 조용히 있다가도 쉬는 시간엔 뛰어놀고…. 연극판의 분위기를 알더라구요. 딸이 아빠를 따라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무대 위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숨소리 하나하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관객과 함께 울고 웃는 카타르시스는 무대에 서보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연극을 할 겁니다.”
연극의 저변 확대와 관심이 필요
그는 연극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져 배우들이 마음 놓고 연극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고대한다. 연극을 하겠다고 왔다가 힘든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는 후배들을 보면 아쉬움이 앞선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지금도 인천에는 열정 넘치는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고, 분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작품 하나를 올리기까지 돈과 인력 등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것을 알기에 더욱더 안타깝다는 그는 “대학로까지 안 가도 인천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연극을 볼 수 있는데 관심이 적어 속상하다.”고 털어놓는다. 이어 “문화계도 시민도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정을 주신다면 배우들도 신이 나 더 뛰어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고 자부한다.”고 덧붙인다.
“그냥 가는 시간은 없습니다. 늘 노력하고,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가야 하는 거죠. 항상 연극배우라는 자부심을 활력 삼아 관객들에게 다양한 캐릭터로 더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극인 이병철 씨의 공연이 보고 싶다면?
가족극 ‘옹진군 옹진골 옹고집 이야기’
일시 : 8월 18~20일(금요일 저녁 7시 30분,
토요일 오전 11시, 오후 3시, 일요일 오후 3시)
장소 : 다락 소극장
티켓 : 성인 1만 원, 어린이 5천 원,
가족특별할인(어른 1명+어린이 1명) : 1만 원
관람연령 : 10세~성인
문의 : 다락 소극장 ☎ 777-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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