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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도시재생’ 꿈꾸는 무용가 박혜경
춤으로 ‘도시재생’ 꿈꾸는 무용가
박혜경
짧은 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반짝거리는 눈 그리고 왜소하지만 다부진 몸매. 뭘 해도 잘할 것 같은 캐릭터다. 박혜경(51) 씨는 ‘인천’이란 무대 위에서 30년 넘게 춤을 춘 무용가다. 인천무용협회장을 지낸 그는 ‘정통’을 고집하지 않는다. 인천 춤판의 지경과 지역 무용수들의 무대를 한 뼘이라도 넓히기 위해 다양한 춤을 선보인다. 무용은 특정한 이들만의 예술이 아닌 누구나 즐기는 ‘놀이’임을 몸소 실천한다. 우아함보다는 친숙함을 택했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몸짓
윤미래의 ‘그대라는 세상’이 흘러나온다. 남구학산문화원 3층 프로그램실에 예닐곱 명이 대형 거울 앞에서 음악에 맞춰 서서히 몸을 푼다. 그들은 노래를 귀로 듣기보다는 몸으로 받는다. 근육을 풀고 관절을 맞춘다. 노래가 넘어 간다. ‘해 해 해야 해야 내가 간다. 너를 품으려 내가 날아간다. 간다 간다 새가 되어 간다’ 오랜만에 듣는 김학래의 노래가 모두를 춤추게 한다.
“음악 듣고 리듬 타시고.” “내려가지만 몸은 달려있는 느낌으로.” 리듬을 완전히 탄 박혜경 선생을 따라 교육생들도 짜여 진 군무를 펼친다. 동작이 재밌다. 꼭두각시 몸짓, 취권, 매트릭스, 시건방 춤, 승무 나빌레라, 김연아의 아이싱댄스, 배비장의 건들거림, 요조숙녀의 새침 띠기, 백조의 호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몸짓들이 다 보인다.
그들은 노래를 귀로 듣기보다는 몸으로 받는다.
근육을 풀고 관절을 맞춘다.
작품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
소녀는 전남 해남의 시골학교 운동회 무대에 단골로 섰다. 중학교 무용부에서 발레를 배운 후 광주의 송원여고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무용을 배웠다. 대학 진학을 위해 죽어라고 춤을 추었다. 끼도 있고 재능도 있는데 키가 ‘너무’ 작았다. 학원이든 무용부에서든 그녀의 선이 가장 짧았다. 서울예전을 발레 전공으로 들어가 중간에 현대무용으로 전과했다. 다른 대학은 무용수 양성 교육에 힘을 기울였지만 서울예전은 작품과 안무법에 치중했다. 체질에 딱 맞았다.
1986년 대학 2년 때 인천에 사는 친구의 권유로 옛 시민회관에서 열린 시민의 날 축하 무대에 섰다. 일회성인줄 알았는데 그게 지금까지 오르고 있는 인천 무대의 시작이었다. 인천에 거주하며 전국 단위의 무용대회에 출전해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인천에 유일하게 있던 인천전문대 무용과 강사로 콜을 받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그 학교 교수와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인천현대무용단 창단 주역으로서 인천 무대에 본격적으로 올랐다. 인천전문대 무용과가 폐과되자 인천현대무용단을 ‘코리아액션 댄스컴퍼니’로 개명하고 이끌어갔다. 대학 문을 나선 제자 중 댄스스포츠나 비보이로 전향한 제자들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기 위해 무용단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즈음 그는 인천무용협회장을 맡는다. 2012년까지의 회장 재임 중 인천 무용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지역 무용인들만의 행사에 그치던 무용제를 해외 무용가가 참여하는 ‘인천국제무용제, 위즈 월드 댄스 페스티벌(Wiz World Dance Festival)’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인천무용이 작품성과 대중성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 당시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소녀는 전남 해남의 시골학교 운동회 무대에 단골로 섰다. 중학교 무용부에서 발레를 배운 후 광주의 송원여고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무용을 배웠다. 대학 진학을 위해 죽어라고 춤을 추었다. 끼도 있고 재능도 있는데 키가 ‘너무’ 작았다. 학원이든 무용부에서든 그녀의 선이 가장 짧았다. 서울예전을 발레 전공으로 들어가 중간에 현대무용으로 전과했다. 다른 대학은 무용수 양성 교육에 힘을 기울였지만 서울예전은 작품과 안무법에 치중했다. 체질에 딱 맞았다.
1986년 대학 2년 때 인천에 사는 친구의 권유로 옛 시민회관에서 열린 시민의 날 축하 무대에 섰다. 일회성인줄 알았는데 그게 지금까지 오르고 있는 인천 무대의 시작이었다. 인천에 거주하며 전국 단위의 무용대회에 출전해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인천에 유일하게 있던 인천전문대 무용과 강사로 콜을 받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그 학교 교수와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인천현대무용단 창단 주역으로서 인천 무대에 본격적으로 올랐다. 인천전문대 무용과가 폐과되자 인천현대무용단을 ‘코리아액션 댄스컴퍼니’로 개명하고 이끌어갔다. 대학 문을 나선 제자 중 댄스스포츠나 비보이로 전향한 제자들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기 위해 무용단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즈음 그는 인천무용협회장을 맡는다. 2012년까지의 회장 재임 중 인천 무용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지역 무용인들만의 행사에 그치던 무용제를 해외 무용가가 참여하는 ‘인천국제무용제, 위즈 월드 댄스 페스티벌(Wiz World Dance Festival)’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인천무용이 작품성과 대중성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 당시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청춘을 생각하니
바람이 부는 대로 그렇게 걸어왔네
하늘의 하늘의 해야 너는 식지 않는 청춘
메마른 내 청춘에 너의 빛을 주렴’
그들이 하는 것도 ‘예술’
50 초반 줄의 그는 스스로를 ‘할머니’라고 부른다. 이제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친구들’과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길 원한다. 친구들은 동료 선후배이고 아이들은 제자들이다. 지금은 협회 회장에서 물러난 이후 연수구무용협회 회장을 맡아 ‘동네’에서 활동 중이다. 2013년부터 해마다 4년째 열린 ‘연수국제무용제’를 이끌고 있다. 인천국제무용제가 기성 무용가와 안무가 등 전문 예술가를 위한 무대였다면, 이 무용제는 눈높이를 낮춰 젊은 감각의 신진 무용수를 출연시키고 더 나아가 비보잉, 밸리댄스, 에어로빅 등도 선보였다. 그럴 때마다 “대체 정체성, 장르가 뭐냐?”라는 시비조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들이 하는 것도 예술.”이라는 게 그의 답이다. 그런 그에게 지역은 후한 점수를 줬다. 그는 2015년 ‘제33회 인천시 문화상’ 공연예술 부문에서 수상했다.
요즘 그가 빠져 있는 것은 ‘커뮤니티 예술’ 분야이다. 쉽게 말하면 동아리 교육이다. 남구학산문화원은 몇 년 전 주민 춤꾼을 모집해 ‘학산춤패’라는 작은 동아리를 만들었다. 자동차 딜러, 초교 교사, 주부, 회사원 등이 모였고 춤 선생으로 그가 청빙되었다. 다양한 춤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주민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그들 삶의 경험을 춤으로 재현한다. 학산생활문화센터 ‘마당’은 주민들이 문화를 향유하고 창작하며 지역문화를 창조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하는 이’와 ‘보는 이’의 경계 없이 참여하고 어우러진 옛 두레공동체의 공간을 모토로 했다.
그는 얼마 전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0월 통과를 목표로 ‘남구학산문화원 놀래 문화예술 교육 활동을 매개로 한 도시재생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예전에는 무대에 올릴 자신의 작품이 무조건 먼저였다. 시민과 함께 하는 커뮤니티 예술을 하면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주민과 함께하는 예술이 지역을 재생시킬 수 있다는 믿음까지 이르렀다.
그는 스텝 한 발짝 뛰기도 힘겨워하던 몸치들을 기본부터 하나하나 교육시켜 학산마당극 놀래 동아리 경연마당에 몇 년째 올리고 있다. 2015년 주안8동 주민과 함께 만든 시장사람들의 일상을 표현한 ‘서있는 사람들’은 무대 안팎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꽃무늬 장화를 신고 한국무용을 접목해 탭댄스를 췄다. 지난해는 조수미가 부른 ‘꽃밭에서’를 배경으로 ‘담쟁이’를 올렸다. 말없이 담을 넘는 담쟁이의 삶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춤으로 응원했다.
올해 9월에 열리는 놀래 마당에서는 ‘또 다른 시작’이란 주제의 7분짜리 춤판을 벌인다. 그 메인 음악이 ‘해야 해야’다. 박혜경 춤 선생과 인생 좀 살아 온 커뮤니티 제자들과의 다양한 몸짓이 가사 그 자체다. ‘하늘을 바라보며 청춘을 생각하니 바람이 부는 대로 그렇게 걸어왔네 하늘의 하늘의 해야 너는 식지 않는 청춘 메마른 내 청춘에 너의 빛을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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