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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같은 하늘다른 시간을 품은 공간

2017-09-29 2017년 10월호




같은 하늘 다른 시간 품은 공간

강화에는 무수한 시간의 층이 쌓여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 깊숙이 들어갈수록 같은 하늘 다른 시간을 만난다. 가을이라지만 유난히도 맑은 날, 강화읍에 있는 근대 건축을 찾아 길을 나선다. 어느 집은 높다란 담장 안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주인 잘 만난 집은 묵은 먼지를 털고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옛 조양방직

‘살려 달라’ 건물이 말을 걸다


옛 조양방직 공장.
이끼가 움트던 폐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옛 건물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이용철 씨의 ‘귀한’ 손.
그는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절했다.
“이 건물만 찍으세요. 나는 이곳을 주물럭거리다 가는 사람이지만,
여긴 영원할 테니까.”




수더분한 강화 땅에, 한때 시커먼 공장들이 쉴 새 없이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구불구불 골목길을 지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양방직을 찾았다. 육중한 몸집의 콘크리트 건물이 세월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강화도의 실업가 홍재묵과 홍재용이 ‘조양방직’을 세우면서 강화의 직물산업이 가내수공업에서 공장화됐다.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고 밤늦도록 직물 짜는 기계가 돌아갔다. 하지만 1990년대 현대식 섬유공장이 생기고 신소재 섬유가 나오면서, 강화 직물산업은 내리막을 걸었다. 멈춘 시간 속 이끼가 움트던 폐허에, 다시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살려 달라’ ‘도와 달라’ 말을 걸었어요.” 이용철(52) 씨는 조양방직 터에 고물을 찾으러 왔다 아예 건물에 손을 대기 이르렀다. 당시 공장 터는 쇠 파이프 더미에 뒤덮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이 씨는 무너져가는 폐허에서 시간의 연속성이 낳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세월의 무게를 떠받든 트러스 구조의 이끌림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래, 같이 가보자’ 결심을 했다.
“건물이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졌어요. 이곳을 만지면서 무언가를 부수고 바꾸는 일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무너져가는 건물이 예쁘잖아요. 잘 살려야죠.” 올해 말이면, 그의 손길과 숨결이 스민 갤러리 카페가 문을 연다. 원래 있던 곳처럼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더욱 기대가 된다. 조양방직 공장이 자욱이 쌓인 세월의 먼지를 털고, 본연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그날이.


옛 평화방직 공장 터, 강화 직물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을
나무 전봇대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 평화방직

어제의 역사, 그리고 오늘의 삶

강화 직물산업은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조양방직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직물공장 130여 개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웸블리 넥타이가 쏟아져 나오고, 이불 안감이나 기저귀감으로 쓰던 무명 천이 ‘강화소창’이란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지금은 네 개의 공장이 가내수공업을 하며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마저도 대부분의 공장주가 여든이 넘는 어르신이라 언제 손을 놓을지 모른다.
그나마 강화군이 ‘인천 가치 재창조 선도 사업’으로 소창의 명성을 되찾으려 한다니 다행스럽다. 그 첫걸음으로 옛 평화직물이 소창 체험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1956년에 역사를 시작한 이 공장은 1990년대 문 닫는 날까지 난초와 봉황이 새겨진 각색 양단을 생산했다. “군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에 소창 체험관을 짓기로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은하직물이 올해까지만 운영한다고 해요. 공장이 문을 닫으면 기계를 하나둘 들여올 계획입니다.” 강화군 문화관광과 종인선 팀장의 설명이다.
그 옛날 쉴 새 없이 직조기를 돌리며 강화 사람들을 먹여 살리던 공장은, 이제 어제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 체험관이 문을 열면, 뉴욕에 사는 평화직물의 창업주 고 마진수의 아들 마영환 씨가 꼭 오겠노라 약속했다고 한다. 울타리 밖 옛 공장 터에, 강화 직물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을 나무 전봇대 두 개가 가만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국현의 가옥 내부.
색유리로 만든 창은
당시 일본에서 공수한 것이다



옛 황국현 가옥

고택 보듬는 고마운 새 주인


강화읍에는 1900년대 초부터 지어진 근대 한옥이 곳곳에 있다. 어느 집은 높다란 담장 안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가고, 주인 잘 만나 쓸고 닦은 집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빛이 났다.
강화읍 남문안길을 걷다 고풍스런 고택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강화도 천석꾼으로 알려진 황국현의 가옥이다. 5년 전부터 도예가 최성숙 씨가 들어와 보듬고 어루만지며 살아가고 있다. “한옥에서 살고 싶어서 강화와 제주를 오가다 8년 만에 이 집을 발견했어요. 어찌나 견고하고 아름답던지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답니다.” 먼지로 뒤덮이고 넝쿨에 둘러싸인 고택이지만, 최 씨는 그 안에 섬세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고택은 현재 tvN 드라마 ‘명불허전’을 촬영하고 있어 뷰 파인더에 담을 수 없었다. 집주인이 대신 안을 둘러보는 걸 허락했다. 1928년에 지은 이 집은, 천석꾼의 집답게 당시 할 수 있는 호사를 다 누렸다. 백두산에서 잣나무를 베어와 대들보와 서까래를 올리고, 창틀과 문틀, 마루, 문간을 하나하나 다 짜 맞췄다. 색유리로 만든 창으론 햇살이 은은하게 스며든다. 유리는 당시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집주인의 섬세하고 깊은 안목이 느껴진다. “배우 김남길 씨가 이 집의 기가 좋아서 드라마가 잘 된다고 하더라고요.” 시대와 변화를 거스르며 옛 것을 지켜낸 고마운 새 주인. 그 덕에 고택은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건강한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장 씨 집안 삼대 째 머무른 고택.
“강화도가 좋아, 이 집도 좋고.
다시 고향을 떠나기가 싫었어.”



장지영 가옥

달빛 아래
슬레이트 지붕을 인 한옥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비슷비슷한 집들 사이, 아직 남아 있는 빛을 따라 한 고택에 다다른다. 때마침 마당을 거닐던 주인 어르신께 인사를 건넨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실례지만 집 구경해도 될까요.” 맘씨 좋은 집 주인이 문을 활짝 열고 낯선 여행객을 반긴다.
넓은 마당을 감싸는 긴 담장, 고상하게 꾸민 화단. 고아한 멋이 흐르는 한옥.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양반집 규수가 눈앞에 아른거릴 것만 같다. 장지영(70) 선생은 13년 전 아내와 함께 낙향했다. 원래 한 2년 정도 살다 다시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강화도가 좋아, 이 집도 좋고. 다시 고향을 떠나기가 싫었어.” 1937년 당시 사법서사였던 장 선생의 할아버지 고 장두영 씨는 이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그 후로 장 씨 집안 대대로 머물렀다.
바람 솔솔 부는 대청마루에 앉았다. 집에는 소통하고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린 공간으로 햇살과 바람이 자유로이 오가고 공간과 공간,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 “집을 참 깨끗하게 잘 관리하셨어요.” “속만 깨끗하지 겉은 잘못됐어. 기와를 걷어낸 게 이 집으로선 가장 큰 실수야.” 그러고 보니 한옥에 얹힌 슬레이트 지붕이 낯설다. 기와가 낡아 비가 새니 어머니가 닦아내고 대야로 받치다, 결국 기와지붕을 걷어낸 것이다. “다른 건 옛 모습 그대로인데…. 그땐 내가 몰랐어….” 어르신이 아쉬워하며 말끝을 흐린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옛 공간에 머물며 사람을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햇살이 사그라진 자리엔 가을밤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주인은 어디 있을까’ 굳게 닫힌 윤광한 가옥 .
시간이 쌓인 고택 지붕 위로 노을빛이 쓸쓸하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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