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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읍내 땅 밑 ‘고려’ 있다

2017-09-29 2017년 10월호



읍내 땅 밑 ‘고려’ 있다

강화는 도읍지(都邑地)였다. 39년간 고려의 ‘서울’이었다. 그래서 ‘강도(江都)’라 불렸다. 고려의 도읍지가 된 ‘역사’를 언뜻 들으면 실망이다. 피난처였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 건설한 몽골 제국은 대륙의 동쪽 끝으로 말발굽을 향했다. 고려는 1231년 1259년까지 총 6차례에 걸쳐 몽골에 맞서 싸웠다.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했다. 바다가 없는 몽골은 물에 아주 약했다. 개경(송도)에서 가까운 강화도가 제격이었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형이 개경과 비슷했다.
급하게 천도(遷都)했지만 강도는 허술하게 건설되지 않았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그대로 본 떠 만들었다. 도성(都城)을 만들고 궁궐은 물론 관청, 사원, 거주지, 시장 등을 조성했다. 지명도 그대로 가져왔다. 또 하나의 개경이 건설됐다.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드론 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강도는 억울하다. 분명 40년 가까이 고려의 도읍지였지만 경주, 부여, 공주처럼 고도(古都)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백제 역사에서 60여 년간 도읍으로 자리했던 공주가 고도로 인식되는 것과 비교된다.
1270년 고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강도는 쇠락했다. 강화도는 그저 하나의 섬으로 돌아갔다. 궁궐도 사원도 주인을 잃었다. 그리곤 모든 게 묻혔다. 다행히 도성을 감싸 안았던 성곽(토성)은 남아 있다. 현재 보이는 것만 약 11km이다. 원래 성곽은 16~1km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강도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고려 궁궐은 현재의 강화읍 관청리 일대에 있었다. 스러진 고려 위에 조선이 섰고 이후 개항기,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 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거쳤다. 그러면서 고려의 색채는 완전히 옅어졌다. 그곳은 강화군의 읍내가 됐다. 현재의 읍내 사람들은 고려를 딛고 다닌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 땅 밑에는 분명 고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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