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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531호 마음까지 치유하는 바다 병원
인천 531호
마음까지 치유하는 바다 병원
한 번 출항하면 2박 3일을 섬과 바다에 머문다. 배 댈 곳이 없어 바다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잠을 청할 때도 있다. 병원선 ‘인천 531호’는 섬사람 하나하나 아픈 곳을 살뜰히 살피고 마음까지 보듬는다. TV 드라마처럼 외과 의사도 없고 수술도 못 하지만, 섬사람들은 육지 병원보다 바다 위 병원을 더 믿는다. 이른 아침, 소이작도로 향하는 ‘인천 531호’에 올랐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류창현 포토디렉터
평생 허리가 굽도록 찬바람 맞으며
억척스럽게 삶을 일군 사람들.
침을 맞아도 그 효력이 하루를 못 간다.
하지만 그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늘’ 일하기 위해
병원선을 찾는다.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
오전 8시, 행정선이 오가는 연안부두 선착장. 9시로 약속된 ‘인천 531호’의 출항 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졌다. 오늘 여객선이 소이작도로 10시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 시간에 맞춰 섬 주민이 진료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인천 531호는 옹진군에서 운영하는 111톤 급 병원선이다. 의료 시설이 없는 자월면과 덕적면, 연평면의 열 개 섬을 돌며 의료 활동을 한다. 공중보건의 세 명과 간호사 두 명, 선박을 지원하는 여섯 명의 식구가 함께 뱃길에 오른다.
병원선은 1978년 ‘비둘기호’라는 이름으로 처음 닻을 올렸다. ‘인천 531호’는 1999년 7월 첫 항해를 했다. 당시 아픈 섬사람들을 보듬는 건 오로지 바다 위 진료소뿐이었다. 황정진(59) 선장은 인생의 절반을 병원선에서 보냈다. ‘뱃놈’이 두려울 게 무엇이냐며, 호기롭게 배에 오른 스물 일곱 청년은 이제 두 달 후면 정년을 맞는다. “첫 항해가 생각나. 대부도였는데, 월요일에 출발해서 닷새 후에나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지. 그때는 영종도며, 무의도며 안 간 섬이 없었어.” 그 후로 오랜 세월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다. 지금이야 헬기가 섬과 육지를 오가지만, 과거에는 환자가 생기면 온 세상이 잠든 밤에도 달려가야 했다.
그래도 병원선에 타길 잘했다. 바다 위를 달리다 보면, 종종 시커먼 뱃사람이 다가와 날 살려준 분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곤 한다. “돌아보면 참 뿌듯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가 아쉬운 마음에 말끝을 흐린다. 평생 함께한 섬사람들 생각에, 노장은 30여 년 잡아온 키를 쉽게 놓지 못할 것이다.
병원선을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는 섬은
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오늘’ 일하기 위해, 병원선을 찾다
푸른 물결 위로 소이작도의 실루엣이 보인다. 의약품을 채우고 기구를 정비하느라 병원선 식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 진다. 뱃머리가 섬에 닿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섬마을 사람이 몰려든다. 병원선에서 하는 내과, 치과, 한방 진료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건 침 치료다.
“섬에서 어디 쉽게 침을 맞을 수 있나. 온몸이 쑤시지 않은 데가 없으니, 병원선 오는 날만 기다려져.” 평생 허리가 굽도록 찬바람 맞으며 억척스럽게 삶을 일군 사람들. 침을 맞아봤자 그 효력이 하루도 못 간다. 하지만 그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늘’ 일하기 위해 병원선을 찾는다. “이제 굴 따러 나갈 수 있겠어. 여기서 침 맞는 거 때문에 내 여직 버티고 살아.” “다음에 또 오세요. 건강하세요. 할머니.” 따스한 한마디가 의료진의 손길만큼이나 마음에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섬 주민뿐 아니다. 섬에 상주하는 군인들도 병원선이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소이작도 해군기지의 김종식 기지대장은 어깨가 아파서 이곳을 찾았다. 24시간 섬에서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파도 참는다고 했다. 의무대가 있긴 하지만 병원선에서 침을 맞고 약도 타야 몸이 낫는 것 같다. “나라 지키는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오해 받는데, 허허. 여기 앉으세요. 어르신.” 병원선이 오는 날은 동네 어르신들을 모두 뵙는 날이라고 했다. 섬을 지키는 듬직한 사나이가 진료를 기다리며 섬 어르신들과 두런두런 담소를 나눈다.
현실 속 병원선에서는 TV 드라마처럼 외과 의사도 없고 수술도 못 한다.
하지만 섬에서 받기 어려운 침이나 치과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소이작도 오 남매 이장님 댁의 김효자(65) 할머니.
약은 병원선에서 주는 게 최고다.
다른 데서는 타봐야 낫지가 않는다.
다정하게 동네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전정식(48) 항해사.
진료 받은 해군에게
감사의 의미로 받은 ‘일용한 양식’
여전히 병원선을 기다리는 사람들
지금은 세월이 좋아서 육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몇 년 전 섬에 번듯한 보건 진료소도 문을 열었다. 하지만 병원선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섬 주민들에게 병원선은 삶의 일부에요. 배가 왔다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지면 반가워서 열 일 제치고 마중 나가세요. 아버지, 어머니들은 소이작도 보건소보다 병원선이 더 익숙하세요.” 진료를 마친 어르신들을 동네로 모시러 온 김석진(42) 이장과 만났다. 약이 없어서가 아니다. 수십 년 섬을 오갔으니, 병원선 사람들은 어느 집 누구의 건강이 어떻고 무슨 약이 필요한지 다 안다. 섬사람들에게 병원선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병원선 사람에게도 섬 주민은 특별한 존재다. “모두 친구들이야. 섬에 가면 삼겹살에 소주 한상 차려놓고 ‘스탠바이’하고 기다려. 안 오면 서운해 해.” 황 선장은 섬사람들을 ‘친구’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치과의 권율(28) 씨는 연평도에 있다 일 년 전 병원선에 올랐다. 섬에서는 받기 어려운 치과 진료를 할 수 있어 뿌듯하고, 주민이 따듯하게 대해줘서 고맙다. 동네 어르신들이 자식 같은 그에게, 날것을 잡아다 회를 떠 주고 물고기를 통째로 건네주기도 한다. 그 정에 이끌려 육지에 있을 때도 배 타는 날이 기다려진다.
동네 주민이 하나둘 배에서 나와 집으로 갈 채비를 한다. 병원선 사람들이 행여 넘어질까 어르신들을 부축한다. 처방받은 약봉지를 두둑이 챙긴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행복해 보인다. “감기약은 병원선에서 주는 게 최고야. 다른 데서는 타봐야 낫지가 않아.” 감기만 고치는 게 아니다. 육지에서 뚝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끌어안는 ‘인천 531호’. 그들을 기다리는 또 다른 섬을 향해 다시 아름다운 항해가 시작됐다.
병원선 사람들은 어느 집 누구의 건강이 어떻고
무슨 약이 필요한지 다 안다.
육지에서 뚝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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